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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 박사의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論駁 IV

『환단고기』 위서론의 몇가지 사례와 논박論駁

                                     
앞에서 위서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환단고기』 위서론의 발생 배경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요 논거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고 그 주장의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위서론자들이 문제삼는 것은 주로 『환단고기』의 저자문제, 『환단고기』에 나오는 개념문제, 단순한 내용문제, 그리고 지명문제 등이다. 그런데 위서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환단고기』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볼 때 어떤 역사서가 위서인가 아닌가는 무엇보다도 내용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거나, 저자가 자신의 사관이나 이익을 위해서 없는 내용을 창작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이 제기하는 『환단고기』 위서론의 주요 포인트는 내용보다는 개념이나 지명 등 지엽적인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환단고기』를 연구하여 그 사료적 가치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보다는 일단 『환단고기』 자체를 부정하려는 성급함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조인성의 다음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위서론자들이 사료비판, 정확히는 『환단고기』 비판의 기준으로 삼은 것들이다.

“첫째, 어떤 단어 혹은 술어는 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예컨대 철학이란 단어는 philosophy의 번역어로 근대에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둘째, 인명이나 서명과 마찬가지로 지명도 사료의 설립년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경성부라는 명칭은 1910년 10월부터 사용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어떤 책이 원저자의 저술 이외에 가필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 특정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 저술되었다는 것을 확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에서 이러한 몇몇 근거를 찾고, 그리고 이를 토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환단고기』가 세상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었던 만큼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더빨리 세간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위서론은 학술적 근거를 가진 정당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을 주제별로 하나씩 논박하고자 한다.

 


1. 필사본을 근거로 한 위서론에 대한 논박

조인성은 『환단고기』가 원본이 없는 필사본이라는 것을 근거로 위서라고 단정짓는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거기(『환단고기』)에 수록된 네 책의 저술년대는 모두 조선 전기 이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1911년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에 나오는 네 책이나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있는 문헌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에 실린 네 책이 근대 이후(어쩌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와 아울러 이유립이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점, 현재 『환단고기』의 인쇄본이나 이유립이 갖고 있었을 필사본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그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환단고기』에 실린 네 권의 역사서가 조선 전기 이전에 쓰여진 것인데 이 네 책이나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있는 문헌을 찾기 어려우므로 『환단고기』는 근대 이후 혹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2) 『환단고기』 인쇄본이 없다는 점은 이 책이 1911년 계연수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한다.

1)번의 경우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조선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사서를 수거하여 소각했다는 점, 일제 강점기 민족사서들을 압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소각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 실린 사서들 역시 그러한 계기로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내용상 네 권의 책은 수거나 압수 일순위 책이었을 것이다. 겨우 몇 권 남겨진 사서를 계연수가 구해서 만든 책이 『환단고기』이다. 누구라도 수거령이 내린 불온 서적을 자신의 저서에 인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대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구려국본기 - 요서 10성의 위치, 출처=STB상생방송

 

이맥이 「태백일사」를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비장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에 보면, 왕명으로 수서령을 내렸다. 수서령이 내려진 고서들은, 『고조선비사』, 『표훈천사』, 『고려팔관기』, 『대변설』, 『조대기』,...『삼성밀기』... 『진역유기』...등이다. 수서령을 통해서 조선의 조정은 위의 책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참형에 처한다는 왕명을 내렸다.

알다시피 위에 적시된 역사서들은 『환단고기』에서 인용하는 책들이다. 그렇다면 참형을 무릅쓰고 『환단고기』에 담긴 역사서들을 보관하거나 자신의 저서에 인용되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사정을 떠나서 보더라도 어떤 서적이 다른 책에 인용되지 않았다고 그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조인성의 이러한 주장은 개연적일 뿐 위서의 필연적 증거가될 수 없다.

2)번의 경우는 원본이 없다는 단정이 잘못이다.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다. 1911년 계연수는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와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다. 위서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계연수가 홍범도와 오동진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를 조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환단고기』 진위논쟁이 생겨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환단고기』의 원본(1911년 계연수 간행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환단고기』 원본이 존재했음을 밝혀야 한다. 이유립이 월남하면서 원본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오형기가 필사를 했다면 원본 인쇄본을 바탕으로 했음을 추리할 수 있다. 모본이 없이 필사본이 나올 수 없고, 인쇄 원본을 분실하기 전이라 그 모본은 인쇄본일 것이다. 또한 이유립의 제자인 양종현은 1966년 『환단고기』 인쇄본을 가지고 공부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사실 인쇄본이라고 표현했지만 원본은 목판본이고 이는 『환단고기』 범례에 기록된 내용이다. 안창범은 이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을 비판하고 『환단고기』가 1911년 간행된 진서임을 강조한다.

“桓檀古記, 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 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吳東振兩友之出金, 付諸剞劂”. 국역하면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다. 또한 내가 정성을 다하여 줄친 종이에, 베끼듯이 붓으로 썼다(繕寫)...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새기었다(剞劂)”는 뜻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이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인 근거라고 오도하고 있다. 그것을 지적하면 ‘선사繕寫’를 ‘고쳐 쓰다’로 오역하고 ‘기궐剞劂’을 ‘인쇄’로 오역하고 있다.

즉 위서론자들은 이 범례의 한자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특히 ‘선사繕寫’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정서하다”는 뜻의 선사善寫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창범은 “자전에 의하면 ‘선사’는 원고지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베낀다는 뜻이고, ‘기궐’은 새김칼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원본은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임을 알 수 있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조인성의 의문인 “과연 범례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말은 한문 해석의 오류에서 나온 잘못된 의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지명과 용어를 근거로한 위서론에 대한 논박

이도학은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에서 지명과 개념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조작된 책이라고 주장한다.

영고탑寧古塔이라는 지명은 원래 청나라 시조형제와 관련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주어로 ‘영고’는 여섯이라는 뜻을, ‘탑’은 앉는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청나라 조정이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영고탑이란 지명은 청나라 이전으로 소급되기조차 어렵다. 어쩌면 이것이 『환단고기』 자체를 전면 부정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원시국가’를 비롯한 현대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도 『환단고기』에 대한 의문을 한층 높여주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여 조인성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서 「환국본기」나 「신시본기」에 나오는 ‘남녀평권男女平權’이나 ‘부권父權’이라는 용어가 근대에 들어와 쓰여진 개념이므로 『태백일사』 역시 근대 이전에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박광용은 “‘국가國家’의 개념이 ‘nation’에 해당된다거나, ‘문화文化’의 개념이 전통적인 동양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 개척을 부각시키는 서양적인 ‘culture’의 개념으로 쓰였다거나...‘인류人類’, ‘전세계全世界’, ‘세계만방世界萬方’의 용례들도 근대적인 의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먼저 후자의 용어 문제는 안경전의 역주본 『환단고기』 「해제」 부분에서 자세히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박광용의 주장처럼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국家國’이나 ‘국가’는 ‘nation’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집안’의 의미이다. ‘원시原始’라는 말은 『주역』 「계사」 상편에, ‘국가國家’는 『주역『 「계사」 하편과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 ‘부권父權’은 1452년에 편찬된 『고려사절요』 에 이미 사용된 개념들이다. 그 외 위서론자들이 근대 이후 용어라고 믿는 몇몇 개념들 역시 조선 전기 이전에 용례가 있다.

영고탑은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에도 나오는 개념이다. 위서론자들의 주장대로 이 지명이 청나라 시조와 관련되어 처음 사용된 개념이라면 앞에 거론한 이 책들의 저자와 집필년대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책들은 1796년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이 인용한 『만주원류고』에서는 반대로 『명실록明實錄』을 인용하여 영고탑이 명나라 초기에도 사용된 지명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안창범의 주장처럼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에 대한 기록 말미를 보면 만주어로 ‘여섯’을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으로서 영고탑은 와전된 것이며, 지명이 아니라고 했다. 곧 『만주원류고』가 영고탑을 영고특이라고 와전한 것이다. 이희성 『국어대사전』에도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고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성호사설』에는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를 합하여 동삼성東三城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가 깊다고 하였다” 이처럼 안창범은 영고탑은 영안의 옛성에 있었던 탑이 후에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도학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여긴 ‘영고탑’ 년대설은 자신이 인용한 『만주원류고』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어이없는 해프닝이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이 근거한 두 가지 문제 모두 제대로 된 주장이 아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거나 성급한 마음에 이루어진 엉성한 주장일 뿐이다.


3. 유물 발견을 근거로 한 위서론에 대한 논박

이 문제는 위서론자들이 과연 역사학자가 맞는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역사란 그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것인데, 오랜 시간이 흘러 기록만 있고 그 당시에는 존재했던 건물이나 책들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 기록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올바른 기준은 유물과 유적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근본 방식 조차 부정한 것이 조인성의 위서론이다. 위서론을 위해 역사학자로서의 양식과 양심도 저버린 것이다.

그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연개소문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연씨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며 증조는 광廣이라고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를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조부의 이름이 자유와 태조라는 것은 1923년 중국 난양에서 연개소문 아들의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다.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단군세기』를 비롯한 나머지 책들도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역사 기록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근거로 기록의 사실성을 인정해야하는 상식적인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경우는 분명히 기록이 유물로 입증된 경우이고, 대부분의 역사 기술은 이렇게 검증檢證되는 경우가 많다. 『환단고기』의 같은 내용을 읽고 상식적인 판단을 한 다음의 경우를 보자.

『환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고 연개소문의 가계를 『조대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묘지에서는 천남생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위 인용문은 이도학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같은 위서론자이지만 이도학은 역사학의 기본에 충실하여 『태백일사』의 내용을 그 이후에 발견된 유물과 비교하여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도학이 그 이후에 자기의 입장을 바꿨다는 것이다. 위 두 논문들의 작성 년도로 볼 때, 이도학의 글은 1986년에, 조인성의 글은 1988년에 나왔다. 그 후 1990년에 이도학은 『세계와 나』(1990. 11.)라는 잡지에 「역사를 오도하는 상고사의 위서들」이란 글을 기고한다. 문제는 여기서 이도학은 조인성과 동일한 주장으로 돌아선다. 여기서 건전한 상식이 위서론으로 돌아서는, 즉 그레샴의 법칙, "악화惡貨가 양화 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4. ‘잠청배潛淸輩’를 근거로 한 위서론에 대한 논박

‘잠청배’라는 개념을 근거로 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그 개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어이없는 주장이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역사학에 대한 무지에서 잘못된 역사적 주장을 하는 몰염치沒廉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박광용은 이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많은 지면을 들여서 다음과 같은 논리로 위서론을 주장한다.

“청에 몰래 내통한 무리(潛淸輩)”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우리 역사에서 청에 내통하는 무리가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아마도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전후 중국형의 개화를 거부하고, 일본형의 개화가 우리의 살 길이라고 주장했던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해 갔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청淸과의 단절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대세를 잡은 시기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한 이후가 된다. 이때는 청나라는 곧 중국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잠청배’는 중국에 아부하는 무리가 되어서, 『환단고기』와 같다. 즉 이 서술은 1894년 이후에야 가장 적절하게 맞는 개념이다.

여기서 박광용은 ‘잠청배’라는 개념을 ‘청에 몰래 내통한 무리’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잘못을 범한다. 그렇게 잘못된 개념 이해에서 그는 억지로 그 개념의 년대를 추리하고, 그 잘못된 추리를 근거로 하여 『단군세기』가 고려말에 재상을 지낸 이암의 저술이 아닌 1894년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책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잠청배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잠청배가 나오는 『단군세기』의 구절인 “向年에 潛淸輩之邪論이 陰與百鬼夜行하야 以男生發歧之逆心...”에 대해 안경전은 『환단고기』 역주본에서 이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주석을 달았다.

과거에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간신배가 떠들어 댄 사악한 말이 은밀히 백귀와 더불어 야행하여 고구려의 역신인 남생과 발기의 역심과 상응하여 합세하였는데...

즉 잠청배는 ‘청에 내통한 무리’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간신인 오잠과 류청신을 합쳐서 부른 말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박광용은 잠청배라는 개념을 근거로 하여 『환단고기』가 친일적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위서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같은 위서론자인 이도학에 의해서조차 “『환단고기』의 내용을 이른바 ‘대동아공영론’과도 결부지어 ‘친일적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비판받는다.


5. 표절을 근거로 한 위서론에 대한 논박

표절은 먼저 나온 책을 인용없이 참고하거나, 혹은 그 내용을 자신의 논문이나 저서에 무단으로 옮겨 적는 것을 말한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1911년 이후에 간행된 책들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그 책들의 내용을 표절한 것이고, 결국 『환단고기』가 1911년에 간행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며, 따라서 이유립이 만든 위서라는 주장이다.

 

이유립과 환단고기, 출처=STB상생방송

 

이순근은 ‘『단군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라는 구절이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나오므로 박은식의 책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후 이 논문을 다시 정리한 글에서는 ‘“나라를 형形에, 역사를 혼魂”에 비유한 박은식의 혼백론(魂魄論: 『한국통사』의 서언과 결언, 상해, 1915)도 있고...’라고 하면서 근대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박은식의 글은 “古人云 國可滅 史不可滅 蓋國形也 史神也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를 멸할 수는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으로 자신이 『한국통사』를 짓는 이유를 밝힌 것이다.

『단군세기』에 나오는 문제의 구절은 모두 세 번인데 “國猶形 史猶魂 形可失魂而保乎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겠는가?”, “國無史而形失魂之故也 나라에 역사가 없고 형제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國有史而形有魂也 나라에 역사가 있고 형체에 혼이 있어야 한다.” 이다. 『단군세기』에서는 모두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는 도와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한국통사』의 내용과 『단군세기』의 내용에서 공통된 점은 ‘국가와 역사의 상관성’을 강조한 것이다. 국가가 몸이라면 역사는 혼(정신)이라는 비유가 서로 유사하다.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은 고려 말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나라의 도와 역사의식을 강조했다면, 박은식은 일제 독립운동가이며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과연 그 양자의 글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일단 『단군세기』는 고려말 충신인 이암의 저술이며, 1911년 독립군을 이끄는 두 장군의 지원을 받아 계연수에 의해 편찬된 『환단고기』에 『단군세기』가 실려있다. 그리고 『한국통사』는 1915년에 저술되었다. 뒤에 나온 글을 먼저 나온 글이 참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박은식이 『한국통사』 서문을 쓰면서 ‘고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그렇다면 박은식의 문장은 그 이전 누군가의 책을 보고 그것을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한국통사』와 유사하므로 『한국통사』를 표절한 것이라고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박은식이 ‘국가와 역사의 관계를 형과 혼의 관계로 비유한 것’은 옛 글을 인용한 것일 뿐이다. 그 옛 글이 『환단고기』로 편집되기 전의 『단군세기』라고 생각하거나 『환단고기』 속에 포함된 『단군세기』라고 생각하거나 전혀 논리적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환단고기』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 『한국통사』와 『환단고기』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분명하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단군세기』가 『한국통사』를 참조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서론자들은 『한국통사』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위에서 밝힌 중요한 단서를 고의로 생략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의 경우가 그러하다.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나라가 형이라면 역사는 혼이다.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하고 있는 것은 박은식이 『한국통사』(1915) 서언에서 ‘대게 나라는 형이고 역사는 신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단군세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1910년을 전후하여(아마도 1915년 이후일 듯)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순근도 조인성도 모두 『단군세기』가 1911년 이후의 책인 『한국통사』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위해서 박은식의 고백인 ‘古人云...’을 의도적으로 빼고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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