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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사기]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이유

한무제는 천한天漢 3년(서기전 98) 흉노와 전쟁에 나섰다가 항복한 장군 이릉을 옹호했다는 죄로 사마천을 궁형宮刑으로 몰고 갔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궁형은 부형腐刑, 음형陰刑, 극형極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궁형은 음형淫刑인데,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유폐幽閉하는 것으로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형보다 덜하지 않은 형벌이었습니다. 잠실(거세하는 곳)에서 거세당한 후 바람과 햇빛이 없는 곳에서 100일 동안 견뎌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형벌이었습니다.

궁형을 선고받으면 사형을 자청할 정도로 치욕스런 형벌이었으므로 사대부로서 이를 당하면 자결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대부분 사마천이 자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는 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견뎌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서》 〈사마천열전〉에 실린 <임안에게 드리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 또는 <임소경에게 보내는 편지[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 고 불리는 유명한 편지에서 사마천의 심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 편지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고통보다 더 슬픈 것은 없고,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더러운 행실은 없으며, 궁형宮刑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이 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의 수를 비교한 바는 없지만 한 세대만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그랬습니다.(《한서》<사마천열전>)
그러면서 사마천은 임안에게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또 내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절개를 위해 죽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슬기가 다하고 죄가 극에 달해서 면할 수 없기에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제가 세운 것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털보다 가벼우니 이는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쓰인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한서》<사마천열전>)

지금 자결하는 것은 혼자 도랑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경구독自經溝瀆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토로였습니다. 그런 죽음은 사마천에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저는 불행히도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어,홀로 형제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또 용기 있는 자라고 반드시 절개를 위해 죽지는 않으며 비겁한 사내도 의義를 사모하면 어찌 힘을 쓰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노비나 비첩婢妾도 오히려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이를 얻지 못하겠습니까?(《한서》 <사마천열전>)”

사마천은 귀한 신분으로 치욕스런 형벌을 당했지만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나라 서백은 백작이었지만 유리牖里에 갇혔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지만 다섯 형벌을 다 당했고, 회음淮陰은 왕이었지만 진陳나라에서 형장을 받았고, 팽월彭越과 장오張敖는 남쪽을 향해 고孤(제후의 자칭)라고 자칭했지만 옥에 갇혀 죄를 받았고, 강후絳侯는 여러 여呂씨를 주살해 권력이 오백五伯(오패)보다 더 했지만 죄를 청하는 방에 갇혔고, 위기魏其는 대장이었지만 붉은 수의를 입고, 손발에 차꼬를 찼으며,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에 의탁해 종이 되었고, 관부灌夫는 권세 있는 집안(무안후武安侯)에서 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이들의 사례를 길게 나열하는 것으로 자신이 자결하지 않은 이유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치욕스런 삶에 대한 애착으로 귀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옛날에 부귀했으면서도 이름이 사라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오직 기개가 빼어나고 비상한 사람들이 칭송받았다.”면서 치욕을 견디고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서백西伯(주문왕)은 구속된 후《주역周易》을 풀이했고, 중니仲尼(공자)는 곤궁할 때 《춘추春秋》를 지었고, 굴원屈原은 쫓겨 난 후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후에 《국어國語》를 지었고, 손자孫子는 발이 잘린 후 병법兵法을 닦았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에 유배된 후 《여람呂覽》을 세상에 전했고,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힌 후 《세난說難》,《고분孤憤》을 지었습니다. 《시경詩經》 300편도 대저 성현聖賢(공자)께서 발분發憤해서 지으신 것입니다.(《한서》 <사마천열전>)

이들이 훗날 당나라 한유韓愈가 불평지론不平之論, 또는 불평지명不平之鳴의 문학으로 높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이런 위인들이 남긴 업적에서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답답하고 맺힌 것이 있었지만 그 도가 통하지 못하자 지난 일을 서술해서 앞으로 올 사람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좌구명은 눈이 멀었고, 손자는 발이 잘려 끝내 쓰여질 수 없었으므로 물러나 서書와 책策을 논해서 그 맺힌 것을 풀고, 공문空文(당시에는 실현될 수 없던 글)을 전해 스스로 드러내려고 생각했습니다.(《한서》<사마천열전>)”

사마천도 후세에 할 말이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슴 속에 드러내지 못한 것을 그대로 남기고 죽으면 그야말로 한이 될 것이었습니다.

“꾹 참으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고, 분토糞土(감옥) 속에 갇혀서도 사양하지 않은 것은 제 마음 속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 한恨이 되었고, 비루하게 죽으면 문채文采가 후세에 드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서》<사마천열전>)”

한恨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다하지 못한 것을 풀어 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恨 때문에 죽지 못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한을 푸는 방법은 문채를 후세에 전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죽을 날을 기다린 연후에야 옳고 그름이 판정될 것입니다. 글로써 제 뜻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제 누추한 뜻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한서》<사마천열전>)

 

 

위 내용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블로그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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