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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리학의 태두 이석영과 단학회,단단학회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1920 ~ 1983)

자강 이석영 선생은  20세기  한국 명리학의 태두이다. 그는 5대 단학회의 간사를 맡았었고 단단학회 출범시에 본부 준비위원을 역임하고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린 이유립 선생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조부 이양보 선생에 영향받은 이석영 

그는 1920년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자이며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양보(李陽甫)로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다.

1927년 이석영은 8살 되던 해에 9세 연상인 누이가 시집가는 문제를 놓고 조부의 반대에 부딛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혼기에 찬 누이의 배필을 두고 아버지가 가문 좋고 학력이 좋은 이웃 마을의 청년을 사위로 골랐는데, 할아버지(이양보)가 "사위 후보가 단명할 사주"라고 강력하게 말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스펙이 마음에 든 아버지는 결혼을 강행했다. 혼사를 막지 못한 그의 조부는 청상과부가 된 어린 손녀가 자신의 무덤에 와서 통곡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먼저 떠났고, 그 얼마 뒤 조부의 예언대로 젊은 매형이 급서해서 누나가 조부의 산소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어릴 적의 충격적인 경험이 이석영을 역술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주첩경>에 쓰여진 일화를 보면 이석영은   사주의 명인으로 소문난 김선영(金善瀯)에게 사주를 감정받게 된다.  "기묘(己卯, 1939년)년 음력 7월 어느 날 일이었다. 나는 나의 친구 주씨와 함꼐 그 당시 사주에 명인(名人)이라고 소문이 굉장히 높이 난 김선생님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 다음 남방(南方)에 가서 사주보아 먹을 사주요. 사주보면 이름 높이 날거요."라고 말하여 주었다. "(사주첩경) 

해방후 이석영 선생은 결국 월남을 택한다. 1948년 월남하여 충북 청주에서 살았다. 생계수단으로 명리를 보았다. 그를 찾아 밀려드는 내담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명리 공부를 이어가 20년간의 감정과 연구, 실전체험과 학습의 결과로 1969년 <사주첩경> 전 6권을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사주첩경>은 명리학도, 나아가 역학을 공부하는 학인(學人)이라면 꼭 읽어 보아야만 하는 필독서이다.  현존하는 자평명리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출판물 중 하나이며 중국의 사주팔자 이론인 자평명리를 한국적으로 토착화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전임상에서도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예가 많아 명리학의 『동의보감』이라고 칭할 만하다.

명리학이 한반도 격동의 역사 속에서 동양의 인문학으로서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쓴 여섯 권 <사주첩경>은 중국과 일본에 뒤지지 않는 20세기 명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단학회 제천혈맹에 참여한 이양보 선생

단학회의 항일항쟁은 1914년 제천혈맹에서 부터 본격화되었다. 1914년 3월 16일(대영절)에 계연수, 이관집(이유립의 부친), 최시홍, 오동진, 이덕수, 이용담, 김효운, 박응백, 양승우, 이태집, 서청산, 백형규, 등의 12명은 제천혈맹을 맺고 이듬해인 1915년 10월에는 박응룡, 정창화, 박용담, 김병주, 이용준, 이봉우, 허기호, 신찬정, 이양보, 주상옥, 이동규, 김석규, 손인영, 이진무 등 14명이 추가로 결의하였다.

단학회,단단학회에 관여했던 이석영 선생

이석영(李錫暎)은 이유립 선생은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할아버지인 이양보 선생이 단학회 3대 간사였었고 손자인 이석영은 5대 단학회장 시절 단학회 간사를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을 도와 단단학회 창립에 기여하여 본부준비위원이며 단단학회 이사였다. 

이석영은 <커발한> 창간호(1965.4.1)부터 ‘천부경에 대한 나의 관견’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여기에 보면 

"이 천부경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일즉 태백산 석굴에 각치(刻置)하였던 것이나 세인이 오랫동안 구지부득(求之不得)이라가 단기 4250년(1917년)에 와서 운초거사 계연수와 국은 이태집 두 분이 영변 묘향산에 들어가 영약을 캐려다니다가 우연히 심학절벽에 유각(留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천부경 81자를 각기 사출(寫出)하여 운초는 단군교 본부로 보내고 국은은 단학회로 보내여 비로소 세상에 다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라는 중요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부경 칼럼 연재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글은 고향있을 때에 송은 이선생의 천부경 강의에서 의견을 덧분인 것이므로 인용서목을 약하게되었음을 밝혀둔다 갑진(1964년)원단  씀"이라고 정리했다.  

'송은이선생'은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집 선생이다.  1914년에 이관집 선생은 <천부경 집해>라는 글을 썼다. 내용인즉슨 이석영 선생이 고향인 삭주에 있을 당시 이유립 선생 부친으로부터 천부경 강의를 들었다는 뜻이다. 

이석영은 커발한 잡지 창간호부터 연속으로 <천부경에 대한 나의 관견>이라는 칼럼 연재를 통해 <천부경>에 대한 고견을 제시했다.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한 그의 천부경 풀이에 대한 심화된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이유립은 이석영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1969년에 강화도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 간판을 내걸었다. 이유립 선생의 부인 신매녀 씨는 모 언론에서 “내가 이석영씨 집에 5년간 식모살이를 해준 댓가로 이 땅을 기부 받았었다.”라는 언급을 한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유립 선생 가족과 이석영 가족간의 유대관계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1983년에도 경제적 지원을 받아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했다. 이해에 이석영 선생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해방후 남쪽으로 내려와서 20년간 한국 명리학의 거두로 큰 명성을 쌓고 1969년 <사주첩경> 6권을 집대성한 이석영 선생.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왔던 단학회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이를 계승한 단단학회에서 주요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은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1965년 커발한 잡지 창간호에도 이유립 선생의 글 다음으로 이석영의 글이 실려 있다. 

커발한 잡지 2호에 단단학회 본부준비위원에 이자강이라는 이름으로 적혀있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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