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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과 환단고기,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중에서 -

 

문재인 대통령의 임청각 언급
문재인 대통령은 대권 후보시절인 2016년 5월 임청각을 방문하여 "석주 선생께서 항일운동으로 멸사봉공하셨는데, 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것"이라고 하며 "안동이나 유교라고 하면 보수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안동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8월 10일 휴가차 안동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안동 임청각의 원형 복원을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밝힌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경북 안동 임청각을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다시한번 언급하며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며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임청각 바로 앞에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출처 : 안동관광 홈페이지)

이원의 손자 이명이 지은 임청각
안동 임청각은 어떤 곳인가? 안동시 법흥동 법흥교 옆에 있는 임청각을 지은 이는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다. <환단고기>‘단군세기’를 저술한 고려 말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행촌 이암(李癌)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이다. 이원의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이 이곳의 풍경에 매료되어 종택을 건립하였고 그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군자정을 건립하였다. 이후 임청각은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해낸 고성 이씨 종택이 되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과 임청각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99칸 임청각을 당시 돈 2천원에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에게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일본은 일제 시대 철도 부설 때 고성 이씨 가문의 기(氣)를 말살하고 맥을 끊겠다며 의도적으로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앙선이 놓이며 결국 임청각 99칸의 집은 반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 후 고성 이씨 문중이 모금을 통해 가까스로 소유권을 되찾아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임청각 앞을 지나는 철도는 그대로이며 원상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원의 손자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
임청각은 이원의 여섯째 아들 이증의 아들인 이명이 완성했다. 그런데 이원의 막내 아들인 이지(李墀)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 이맥이 고성 이씨 가문의 역사적 사명을 이어가게 된다. 그는 44세 (1498,연산군4)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장숙용이 연산군의 은총을 기화로 호화주택을 짓는 것을 지적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괴산에 유배된다. 이때 이맥은 가문으로 내려온 역사책을 접하게 된다. 
 
“갑자(연산군 10,1506)년에 내가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마땅히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너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다. 이에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고 점고해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과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후 16년이 지난 경진(중종 15,1520)년에 내가 찬수관 신분이라 내각의 비서를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하여 [태백일사]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묻지 못하고 비밀히 간직하여秘藏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심당 주인이 쓰노라.”
 
환단고기의 60%를 차지하는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발문이다.  이맥 선생이 1504년 괴산에서 귀양하고 있을 당시부터 역사서 편찬에 뜻을 두게 되고 1520년 찬수관 벼슬을 하면서 내각의 '비장도서'들을 보며 자신이 몰랐던 우리상고사에 큰 충격을 받고 '태백일사'를 엮어 고성이씨 가문에 비밀리 간직하여 이어져오게 된다.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완성은 환단고기 역사정립
고성이씨 가문은 우리의 진실한 역사를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 가문이다. 
이원의 할아버지 행촌이암 선생은 단군세기를 집필하고 이원의 손자 일십당 이맥 선생은 태백일사를 집필하여 환단고기의 대부분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단군세기』와『태백일사』외에 『삼성기』상하편과『북부여기』를 합하여 펴낸 이는 고성이씨가 아니라 수안 계씨 운초 계연수 선생이다. 그런데 이 계연수 선생도 고성이씨 집안과 계속 인연을 맺게 된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고성이씨 해학 이기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기 선생의 감수를 받아 1911년 환단고기 초간본 30권을 발행하게 된다. 1919년에는 석주 이상룡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 참획군정을 맡아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다음해 경신(1920)년 8월 밀정 감영극에게 잡혀 살해당하여 시신은 압록강에 던져지고 배달의숙과 서적 3000여권 원고들은 불에 타 없어지게 된다. 이때 압록강에서 토막 난 스승의 시신이 수습되는 자리에는 14세의 소년 이유립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환단고기가 고성이씨 이유립 선생을 통해서 1979년 다시 한 번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우리들이지만, 일본에 의해 훼손된 임청각을 비롯한 모든 역사의 원형들이 여전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의 원상회복과 더불어 그 가문에 의해 지켜진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담은 환단고기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질 때, 고성이씨 가문을 포함한 역사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꿈과 바램은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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