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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독립운동가 김종림을 아시나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관이 리모델링이 한창인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해 김종림 선생, 장인환·전명운 의사, 유일한 박사 등 미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동상도 들어선다는 소식이다. 

안창호, 장인환, 전명운, 유일한 박사 등은 많이 들어보았으나 김종림 선생의 경우 낯설고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김종림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엘에이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서 만난 심인태 선생님이 독립운동가 김종림에 대한 자료를 보내왔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김종림 선생을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좌) 젊은 시절의 김종림, 우) 국민회 이사회(1909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종림.

독립운동가 ”김종림의 생애” (1886.1.19 – 1973.1.26)를 알아본다.

김종림 선생은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남도 정평군 창덕면 삼봉리 에서 부친 김도식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이 이민금지(1905.7) 조치를 내린 후에 하와이 이민이 계속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공립신문에는 하와이 이민 후 1907년 1월 2일 알라메다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노동계약은 2년임)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하며 공립협회에 입회 하였고, 캘리포니아의 바실리아 프레즈노 등에서도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8년 전명운.장인환의사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소식을 전하였으며,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 1909년 2월에는 국민회 (공립협회 와 하와이 한인협성회 통합)의 교육업무에 관여하였다.

1911년부터 감자농업을 시작하여 1911년 스탁톤에서 잡화상점인 ’허리상점’에 투자하였으나 파산 하였고  이후 1912년부터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처음 시작하여 윌로우스지역으로 확대하며 1914년에서 1916년 연속 풍년과 1차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자, 실업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닦게 되면서 한인사회에서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도 얻었다.       
                                       
1920 가을 추수를 앞두고 캘리포니아에 대홍수로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큰 타격을 입었을 당시(1921.10)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가 윌로우시 동포사회를 위로 방문 시 김종림 자택 방문기에 의하면 3,300에이커에 한인 15명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백미대왕 김종림과 노백린 장군이 세운 윌로스 비행학교의 학생들과 훈련 비행기 : 1920년 태극기가 선명한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우자 이 소식에 김종림은 1920년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1920년 6월에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하고 조종학생들에게 실습 훈련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해 100년 만의 폭우로 인해서 쌀농사가 실패하자 재정 지원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는다. 짧은 기간 이지만 미주 한인사회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김종림씨의 두아들 김진원(우)과 김두원(좌)씨. 이들 3부자는 모두 일본에 맞서 싸웠다. (사진 : 조선일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종림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1942년에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자녀는 2남1녀로 두 아들은 미해군에 지원해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아들 진원(제임스)은 알루샨 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둘째아들 두원(돈)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서 근무 하였다.

광복 후 60세의 나이에도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으며, 1946 동지회 북미총회가 창립한 한미주식회사가 임페리얼 밸리에서 1천에이커의 벼농사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농사 감독의 일을 맡아 하였다. 

고령에도 김종림은 미주 한인사회의 복리증진에도 참여하였고, 자신이 만든 1세대 이민자를 위한 양로원에서 1973년 1월 26일 서거 하였다.  그의 유해는 잉글우드에 있다가 2009년 4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이민초기 미주 한인들의 삶이란 노예나 다름없었다. 인종차별의 핍박을 이겨내면서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적극 참여 하였고 윌로우스비행학교 설립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시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당시 항공력을 키워 일본을 공격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조국독립의 목표라는 비전을 세우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캘리포니아 윌로우스비행학교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노백린 장군,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대부분 단체 활동에서 재정을 담당 했으며, 좀처럼 인적 이동이 없는 안창호계와 이승만계의 양쪽 진영에서 활약한 애국지사이다. 그의 삶은 오로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고 어떤 경우도 포기 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동포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독립운동을 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좀 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가주 한인역사회’에서는 리들리 시에 1/4축소 독립문과 애국 지사 김종림을 포함 13인의 추모각을 만들어 업적을 기리고 있다.

김종림 기념비. 쌀 농사로 성공하여 윌로스 한인 비행학교 설립에 기여한 공적이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다른 한쪽에는 영어로 적혀 있다. (사진 출처 : 미주한국일보)

[참고 영상] 중가주 한인 이민사 및 동포단체 활동: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애국선열추모위원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채널) https://youtu.be/pZvNmsUsM68?si=bV3urVUMmlCc5q15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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