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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주 독립운동,비행학교 그리고 애국지사 김종림
글. 공군전우회 LA지회장 심인태

2023년은 미주한인이민 120주년이며,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설립한지 103주년이 되는 해다.  

무엇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한국인인가?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을 한 쿠바 한인 이민자 임천택의 자손 헤로니모는 언어와 문화는 잃어버렸어도 ‘한국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가 한국사람을 만든다’고 말한다
 
평소 역사에 관해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 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라고 강조하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재정에 관해서는 “전쟁을 가능케하는것이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보다 더 중요한것은 무기를 구입할 군자금 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서 작전계획이 있다며 재정에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보내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현실적 주장을 폈다.

오늘날 공군은 장병들에게 공군의 기원은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 학교” 라고 교육하고 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1920년에 항공력을 키워 조국의 독립을 이루자는 뜻에서 미국에 거주했던 한인 이민자들이 만든 임시정부때 세워진 최초의 비행학교로 오늘날 공군의 상징적 효시가 되었다.

윌로우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 글렌카운티에 위치한 작은 농촌도시이다. 초기 이민자들이 농사를 지었던 리들리시에서 북쪽으로 400km 올라가면 윌로우스가 나오며 그 곳에 1920년 세워진 한인들의 비행학교터가 있다.

노백린 장군이 1920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설립. [사진 윌로우스 항공기념재단]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인 노백린 장군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흥사단 등의 참여와 현지에서 쌀농사로 거부가 된 김종림 지사의 재정지원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즈 시에 1920년 7월 5일 공식 개교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장교 박희성과 이용근

그 해 가을에  100년만의 홍수로 인해 비행학교 재정지원이 중단 되어 1921년 4월 폐교하기에 이르렀으나, 비행조종사 자격을 획득한 박희성과 이용근에게 임시정부에서는 참위(소위)로 임관시켜 두 한인 최초의 비행장교를 탄생시킨 이 비행학교는 최신 항공술을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 하고자 했던 대한민국공군의 효시로 증명되었다. 

 

김종림 지사

“애국지사 김종림”은 1864년 함경남도 정평군 창덕면 삼봉리에서 태어 났으며, 하와이 이민후 1907년 1월 2일 알라메다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고 공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다.  
                                                  
본토에서 처음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하며 공립협회에 입회하였고, 캘리포니아의 바실리아 프레즈노 등에서도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사회에 소식을 전하였으며,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 1909년 2월 국민회 (공립협회 와 하와이 한인협성회 통합)의 교육업무에 관여하였다.

1911년부터 감자농업을 시작하여 1912년 추정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처음 시작하여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하며 1914년에서 1916년 연속 풍년과 1차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자, 실업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닦게 되면서 한인사회에서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도 얻었다.    

 1918년 3월 10일 맥스웰시에서 백엘리스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김종림은 한인사회의 애국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가을 추수를 앞두고 캘리포니아에 대홍수로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큰 타격을 입었을 당시 (1921.10)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가 윌로우시 동포사회를 위로 방문시 김종림 자택 방문기에 의하면 3,300에이커에 한인 15명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우자 이 소식에 김종림은 1920년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김종림은 공군 양성계획에 흔쾌히 동참하여 약 2만달러의 지원금을 냈으며 또한 매달 3천달러씩 지원해서 교사의 월급지원 및 운영비를 냈다1920년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하고 조종학생들에게 실습 훈련을 했다. 하지만 이해 100년 만의 폭우로 인해서 쌀농사가 실패하자 재정 지원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비행기를 구입하고 비행학교를 열고 조종사를 훈련시킨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미주 한인사회 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한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일본과 싸우게 되자 김종림 3부자는 모두 미군에 입대해 일본과 싸웠다. 가운데 장남 김진원, 차남 김두원 (오른쪽)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종림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1942년에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자녀는 2남 1녀로  두 아들은 미해군에 지원해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광복 후 60세의 나이에도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으며,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가 창립한 한미주식회사가 임페리얼 밸리에서 1천 에이커의 벼농사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농사 감독의 일을 맡아 하였다. 미주 한인사회의 복리증진에도 참여하였고, 자신이 만든 1세대 이민자를 위한 양로원에서 1973년 1월 26일 서거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삶은 오로지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이 목표였고,어떤 경우도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서 동포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독립운동을 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좀더 그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리들리 한인 이민 기념각의 김종림 지사 비문을 심인태 선생의 손자가  닦고 있다. 10월의 어느 날 여러 비석을 함께 청소하였다 (제공 : 심인태)

독립운동가 김종림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추서가 되어 있다. 보훈부가 지금도 매년 독립운동가들을 발굴 공적 심사 후 서훈을 주는 데 애족장은 5등급의 상으로 독립운동 2년 이상 자가 해당된다.  1-3등급 기준은 독립운동 8년이상으로 되어 있다.

김종림은 1909년부터 공립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운동에 참여 하였고, 이승만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와 상해임시정부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시는 재정을 도맡아 하였다. 광복 이전까지 35년 넘게 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그 활동에 비해 서훈등급이 너무 낮다.  
               
최근 자료를 찾아보며 유관순(2019년 대한민국장·1962년 독립장), 홍범도(2021년 대한민국장·1962년 대통령장) 등 독립운동가도 서훈 등급을 상향 조정한  사례가 있는 바,  독립운동가 김종림의 서훈도 상향조정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대한인인국민회 기념관의 모습 (제공 : 심인태)
대한인국민회를 방문한   공군전우회 임원들의 모습 (맨 우측 뒤쪽이 심인태 씨)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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