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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오십두번째'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물질크기로 쫓고 쫓기는 외로운 길 - 지쳐도 있고 의심도 가고

자식들은 시험에 쫓기고 부모들은 일에 쫓기며, 많은 사람들은 빚에 쫓기고 시간에 쫓긴다. 시험에서든 일에서든, 앞을 쫓아가기에 바쁘고 뒤가 쫓아와서 바쁘다.

어느 자리에 있든, 어느 자리에서 뛰든, 모두 불안과 초조 속에서 마음이 넉넉해질 틈이 없다. 자신과 지금, 여기만을 생각하기에 급급하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더 여유가 생겨야 할 텐데...

그러니 자신의 앞을 ‘내다볼 틈’은커녕, 자신의 옆을 ‘둘러볼 틈’도, 자신의 뒤를 ‘돌아볼 틈’도 없다. 아니, 자신을 ‘들여다 볼 틈’조차 없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기 어렵고, 자신이 자신이기가 어렵고, 남을 남이게 하기는 더욱 어렵다. 작은 세상크기가 이런 틈 없음의 일차적 원인이라 할 것이다.

이런 ‘틈 없음’이 이웃 간, 부부 간, 부모자식 간의 틈을 있게 한다. 앞의 시간 틈은 ‘좋은 틈’이고, 뒤의 공간 틈은 ‘나쁜 틈’이다. 있어야 할 ‘좋은 틈’은 없고, 없어야 할 ‘나쁜 틈’은 있다.

쫓고 쫓기는 나날 속에, 나든 남이든, 상대의 ‘자리에 서-보는’ 일은, 혹은 상대의 ‘자리에-서 보는’ 일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남의 자리에 서-보거나 남의 자리에-서 보기는커녕, 남의 말을 듣는 일조차 힘에 겹다. 남의 자리에 서-보고 남의 자리에-서 보거나 남의 말을 듣기는커녕, 나는 나의 자리에 서기도 어렵다.

밖에서 소진한 뒤라서, 남아있는 힘이 이제 없다. 힘이 달리니, 힘을 낼 수 없다. 내 힘이 달려서 상대의 힘을 내 안으로 들여 내 힘을 내보려 했는데, 상대도 힘이 달려 낼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옆집에 살아도 마주치기를 꺼린다. 가서 나누고 함께하는 것이 소통이다. 외적으로는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깝다. 벽 하나의 두께 20~30cm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서로가 상대에게 다가갈 맘이 없다. 아니, 몸이 없다. 홀로가 싫지 않은 것도,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못 나선다. 소통이 될 리 없다. 가벼운 목례도 안 나눈다. 아니, 못 나눈다. 그러니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 무촌(無寸)이다. 너무 가까워서 무촌이 아니라, 너무 멀어 무촌이다.

너무 나뉘니 못 나눈다. 앞의 나눔은 끊음을 뒤의 나눔은 이음을 의미한다. 뒤에 나오는 ‘나눔1’과 ‘나눔2’의 개념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끊음’은 나눔2, ‘이음’은 나눔1로 이어진다.

만나기엔 몸이 지쳐있고 맘이 불안하다. 몸과 맘을 움직일 여력이 없다. 여력이 있다손 쳐도, ‘잘못 만나면’ 나에게 부담 큰 부탁을 하거나 소음 등의 부담이 있어도 말하기 어려워진다. 일단 만나고 나면, 때늦은 후회는 무용지물이다. 원래로 되돌아가려면, 왠지 배신하는 것 같고 보복을 당할 것만 같다.

몸이 안 가니 맘이 없고, 맘이 없으니 몸이 안 간다. 더구나 상대의 사람 됨됨이는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이웃도 강도로 성폭력범으로 돌변하는데,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동 이웃’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는 1cm도 안 떨어진 거리에 아파트의 벽도 없는 상태다. ‘거주 이웃’보다 공간적으로는 더 가까운 함께이다. 1cm 이내의 함께이지만,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때일지라도, 가벼운 목례조차 못 나눈다.

목례는커녕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몸이 지쳐있고 맘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과 남들이 이런 시선과 목례를 이상(異常)하게 생각하거나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다. 나에게 관심이 있나? 아니, 내 지갑에 관심이 있나? 혹은 ‘묻지 마’ 관심?

마음이 안 놓인다. 사람들이 뜸한 늦은 시간에는 사람들이 더 그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무서워진다. 아니,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쁜 관심’에 대한 불안은 몇 배로 늘어난다.

가방을 날리며 쏜살같이 몸을 날린 아줌마도 나를 가까이 하려고 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남들의 이목보다 피곤한 몸을 더 생각하는, 실리를 챙기는 ‘여유’를 아는, 연륜 있는 아줌마들이다. ‘무적 아줌마’들이지만, 무적인 만큼 그들은 피곤하다. 이상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여유를 아는 여유 없음’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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