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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오십네번째'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물질크기로 쫓고 쫓기는 외로운 길 - 모두가 적이네

물질크기에 쫓고 쫓기는 세상크기에서 사람들은 가장 높이 올라가려 하고 가장 많이 이루어내려 한다. ‘최고주의’이고 ‘최대주의’이다. ‘가장’이란 말은 경쟁 속에 쫓고 쫓기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낸다. ‘가장’만을 긍정하고 그 밖은 부정한다.

군대에서는 군기가 빠졌다 해서 한 바퀴를 구보로 돌리고 가장 빠른 자를 빼고 그 밖은 또 돌린다. 이런 돌리기를 반복하면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얼차려를 준다. 꼴찌는 거의 인원수만큼 같은 길을 계속 뛰어야 한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빨리 도달하여야 한다. 함께 뛰는 길이지만, 이는 함께가 아닌 외로운 길이다. 함께지만 홀로다. 아니, 홀로지만 함께다. 외롭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고 양 다리가 풀릴 것 같은 한계상황이 더 문제다.

남을 이기려면 자신과도 경쟁하여 이겨야 한다. 남들과도 나 자신과도 쉬지 않고 경쟁해야 한다. 나도 남도 모두 나의 적인가 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겨야 할 사람들로 넘치는 세상인가 보다. 남도 나도 이겨야 한다. 이길 때는 져야 한다. 지는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나의 이김이 ‘영양가’가 있다. ‘내가 지는 것이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지는 것이 내가 이기는 것’이란 뜻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뜻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니...

쫓음은 어떤 대상을 잡거나 만나거나, 경우에 따라, 추월하기 위하여 뒤를 급히 따름이다. 한자로 경쟁(競爭)은 ‘두 사람이 마주 대하고 말다툼하는’(競) 일과 한 대상을 놓고 ‘서로 잡아당기는’(爭) 일을 가리킨다. 경쟁은 말(咅=言)로든 손 톱(爪)이나 손(手)으로든, 상대보다 앞서기 위해 어떤 것을 놓고 서로 먼저 가지려고 상대와 싸우는 일이다.

공동체(共同體)의 공(共)은 ‘손 넷이 맞-잡은’ 상태요, 우애(友愛)의 우(友)는 ‘손 둘이 맞-잡은’ 상태의 표현이라 했다. 위를 쫓고 아래에 쫓기는 경쟁의 함께에서는, 손이 둘이든 넷이든 그 이상이든, ‘손 맞잡는’ 소통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갑(甲)’ 아님 ‘을(乙)’인 구조인지라, ‘옆으로 나란히’의 ‘병(竝)’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수평을 밀어내는 수직의 갑을 구조는 ‘앞으로 나란히’의 구조다. 앞을 잡아당기고 뒤를 밀어내면서 앞으로만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의 처지와 갈 길을 볼 수도, 봐줄 수도, 배려할 수도 없다. 잡아당기고 밀어냄이 배려일 리 없다. 내가 살려면 앞의 남을 추월해야 하고, 뒤의 남에 추월되어서는 안 된다.

소통은 ‘함께’요 ‘나눔’이다. 서로 잡아당기고 밀면서 서로 앞서려는 속에서, 어떻게 함께와 나눔이 가능할까? 내가 살면 네가 못 살고 네가 살면 내가 못 산다? 함께는 함께지만, 같이 함께 아닌 따로 함께?

그런데 따로에는 같이 하는 그리하여 가치 있는 따로도 있을 것이다. 복잡하다. 많이 물을 문제일 것이다. 뒤에서 더 다룰 것이다. 살기 위해서... 아니, 같이 살기 위해서... 다 살아야 할 존재 사람이니까... 그러니 이는 인의예지와 이어진다. 적어도 ‘새로운 인의예지’의 핵심은 삶, ‘사람같이 다 같이’ 하는 삶이리라.

함께이고 나눔이기는 하다. 그러나 같은 말 ‘나눔’에서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분명히 구분(區分)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나의 것을 남과 나누는 일이고, 하나는 나의 것과 남의 것을 나누는 일이다. 하나는 함께 하는 일이고, 하나는 따로 하는 일이다. 하나는 맞이함의 나눔이고, 하나는 떼어냄의 나눔이다. 하나는 ‘다-입’의 나눔이고 하나는 ‘홑-입’의 나눔이다.

전자를 ‘나눔1’, 후자를 ‘나눔2’로 이름 붙여 이들 둘의 개념을 분명하게 나누려 한다. 나눔1은 함께로 나눔2는 따로2로 이어진다고 우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 ‘잇다’의 나눔이 아니라, 후자 ‘끊다’의 나눔이 문제다. 아니, 둘 다 문제다. 하나는 불릴 문제요, 하나는 줄일 문제다.

따라서 ‘이음’과 ‘끊음’의 두 의미가 같이 들어 있는 나눔에는 ‘함께의 나눔’과 ‘따로의 나눔’이 있다. 함께하는 나눔과 따로하는 나눔은 ‘나를 남과 나눔’과 ‘남과 나를 나눔’의 차이인 것 같다. 둘이 같은 말 같다. 그러니 둘을 ‘나누며 주고받기’와 ‘나누며 떼어놓기’로 표현함이 나을 것 같다.

후자도 함께는 함께이다. 따라서 함께의 방식에도 ‘다-입’의 함께와 ‘홑-입’의 함께가 있다. 나의 입-만을 생각하는 홑-입의 함께는 ‘겉도는 함께’, ‘따로 함께’, 함께 아닌 함께를 말한다. 함께여야 하는 삶인데 동시에 따로여야 한다? 자연본성에 반하는 사회제도일까? 그리하여 이러한 반(反)함 속에 반(半)쪽으로 되는 사람크기와 함께의 크기?

만남이 소통을 전제하고 결과하듯, 함께는 나눔을 전제하고 결과한다. 함께 아닌 함께, 나눔 아닌 나눔이 문제다. 함께와 나눔에서는 ‘나-만’, ‘너-만’이 아니라, ‘나와 너’가 나뉨 속에 같이 한다. ‘나-만’은 ‘나-홀로’다. 나 홀로, 너 홀로가 아니라, 나와 너는 다름의 인정과 존중 속에 만나고 나눌 때, 우리가 탄생하고 함께가 된다.

나와 너 없이 함께가 없듯이, 함께 없이 너도 나도 없는 것이다. 나뉠 수 없는 운명인데 이를 거스르고 자꾸 나누려 하니, 모순과 문제들이 끝없이 발생한다.

단순히 말해, 이것이 우리가 물어내고 드러내고 풀어낼 문제인 작은 소통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작은 소통의 크기 속에 작은 사람의 크기가 함께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함께이든 나눔이든, 같음이든 다름이든, 결국은 그 모양과 방식이 문제라 할 것이다.

경쟁에서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이등 이하의 나머지는 죽어 사라진다는 말이다. 적어도, 살아남는 자는 조금이지만, 떨어져 나가는 자는 많음을 의미한다.

물론, 떨어져 나가는 자가 실제로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꼴찌 한다고 대학진학을 못 했다고 당장 굶어 죽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때는 일등 하는 학생이 일등자리의 유지가 너무 힘에 겨워, 자진(自盡)하여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점수 적고 등수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야 하고, ‘받는 것 없이’ 무시까지 당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 점수와 등수의 다소가 삶의 크기를 결정적으로 결정해야 할까?

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은 쭉 자살률 1위를 차지하는 세상크기다. 한 여중생의 투신자살은 당사자에겐 물론 주변인들에게도 최고의 불행이다. ‘입시지옥’의 교육시스템, 사회시스템 속에서, 그날그날 쫓고 쫓기는 여중생의 삶 크기를 우리의 세상크기가 영(零, zero)으로 만들었다.

또, 인터넷 환경에서 다수가 몰아붙이는 비난으로 인한 연예인의 자살은 ‘순수한’ 자-살일까? 취조를 받는 사람이 극심한 고문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면 이를 ‘자살’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아니면, 한 실업자나 노동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아무리 살려고 애써도 살길이 막막하여 자살을 선택한다면 과연 이를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수의 횡포 속 비난이든, 고문하는 취조든, 국회나 정부에서 못 만들어내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든, 일터에서 학교에서 쫓고 쫓기며 지치게 하는 과잉 경쟁이든, 이들은 이 땅의 작은 소통크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정한 불통 속에 이들이 몰아가는 죽음은 자신의 죽임이기보다는 남들 내지 세상의 죽임, 적어도 남들 내지 세상과 자신이 함께 죽인 죽음들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불행한 삶 가운데 하나인 자살은 ‘삶 크기’의 한 대표적 문제이며, 이는 적어도 자살만이 아니므로 당사자 자신의 사람크기를 훌쩍 넘어 세상크기, 소통크기의 문제로 곧바로 이어진다. 이 땅의 작은 소통크기와 ‘묻지마 시리즈’와의 관계도, ‘묻지 마!’라지만, 보다 합리적인 소통문화 속에 함께 계속 물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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