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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육십 세번째

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수와 같아져라 - 다른 문화들도 다 문화면 다문화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은 점수, 높은 등수를 ‘좋은 것’으로, 그 반대를 ‘나쁜 것’으로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고 있다. ‘점수와 등수 생각하기’에서 가정과 사회, 국가 전체가 ‘같은 생각’이다. 부모와 사회가 ‘같음’과 같으라고 매일같이 들리게 안 들리게 닦달한다.

그러니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아니, 다른 생각이 생겨날 틈이 별로 없다. 나의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가 많이 이렇게 결정된다. 많은 점수나 높은 등수는 하나의 큰 크기이다. 어떤 크기이냐보다 어떤 것의 크기이냐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배려하거나 고려하는 일, 적어도, 함께하는 삶은 별 의미가 없고, 힘세기,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나의 힘세기만이 의미로 여겨진다. 이 힘은 다시 물질크기로 환원된다. 등수에서의 최고는 물질에서의 최대를 향하는 최고다. 최대를 향할 수 있으니 최고로 된다.

우리사회에서 다름 내지 다른 것은 쉽게 ‘이상(異常)한 것’으로 된다. ‘별꼴이야! 이상한 사람이야!’에서처럼, 여기에서 이상함은 부정당해야 될 것쯤으로 여겨진다. 이상(異常)은 이상(異象)하거나 이상(異狀)하여 정상(正常) 아닌 비정상(非正常), 병적인 변종, 타락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이들은 세상의 ‘정상(正常)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거부되고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정상과 이상을 가르는 관습이 늘 정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가름은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모양과 방법을 달리 한다. 대개 관습은 습관적으로는 정상이라지만, 기존과 같음에 경화(硬化)되기에 많이 비판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역의 특색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투리를 보호하고 살려, 우리들의 언어와 사고 그리고 그 표현인 문화와 삶을 풍성하게 하려는 노력은 이런 비판의 맥락과 이어진다.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소수민족들의 삶을 보호하는 일은 소수민족들이 그들-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단조(單調)로움과 정체(停滯)가 무엇인지를 안다. 늘 똑같고 막혀 변화가 없음이다. 이들은 사통팔달의 소통인 ‘소통팔달’(疏通八達)이나 창의적이고 활발(活潑)한 삶의 반대편에 서 있다. 획일주의는 단조와 정체(停滯)를 넘어 정체(正體)성까지 부정하고 급기야, 하나의 존재나 삶 자체를 말살하는 폭력으로까지 나아가기 쉽다.

우리사회에서 가정폭력이 자주 일어난다. 서울의 어떤 파출소의 옆벽에 걸린 현수막에는 “가정폭력! 망설이지 마십시오. 경찰이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많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귀다. 가정폭력을 망설이지 마라니... 더구나 경찰이 도와준다니...

부인이 남편에게, 어린애들이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 2016년 2월 4일 20시에 방금 들은 끔직한 뉴스인데, 한 여중생이 아빠와 새엄마, 새 이모에 희생되어 근 일 년 동안 사는 집의 방 안에서 마른 시신으로 보관되어왔단다. 얼마 전에도 부모가 자신들의 자식을 죽게 하여 냉동고에 오랜 기간 보관했다고 했는데... 이제 보통으로 듣는 뉴스가 된 느낌이지만, 보통 문제인가?

누가 누구에게 휘두르든, 어떤 종류의 힘이든, 이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위에서 아래로 군림하는 수직주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 중심주의와 위 중심주의가 이런 군림에서 함께한다 할 것이다. 첨예화되어...

결혼이나 노동, 무역, 관광, 외교, 유학 등의 통로로,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지리, 국적에서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음식을 먹던 외국인들이 이 땅에도 많아졌다. 우리사회도 이제 다문화 사회로 바뀌었다.

다문화 사회가 다양한 문화 내지 민족들이 모두 ‘다 문화’나 ‘다 민족’으로 인정받는 사회라 한다면, 앞의 주장은 이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가 겉으로는 분명 다문화 사회지만, 다름의 사람과 삶들을 만나는 방식에서, 아직은 삐걱거림이 많으므로 이 이름표를 붙여주기가 많이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다 문화이려면 더 분화이어야 하고 더 문화이려면 다 문화이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농촌총각들이 중개인을 끼고 동남아 등 개발이 덜 된 나라들에서 여성을 만나 돈을 주고 불과 몇 일만에 신부로 데려온다. 이 땅의 성비 균형이 깨진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이는, 한국여성들은 독신이거나, 외국남성을 데려오거나, 외국남성의 나라로 시집간다는 뜻일까? 아니면, 우리사회가 일부다처제? 혹은 비공식적인 일부다처제? 싱글이려는 여성들과 더블이려는 남성들의 공존일까? 많은 것들을 함축하는 현상이리라.

어쨌든, 결혼 이주여성들은 다른 피부색깔이나 부족한 한국말 혹은 후진국 출신 등의 필연적 이유로, 가정 안팎에서 쉽게 무시당하고 거부당한다. 이들은 언어폭력, 신체폭력에 시달리다가 도망가거나, 그 결혼은 급기야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 2세들은 물론, 이 땅의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비슷한 이유로 쉽게 무시와 배제, 폭력 속에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예(禮)가 아니다. 손님을 같은 사람 혹은 그 이상으로 존중하고 배려함의 태도와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어나 피부색, 출신지, 성(姓)과 성(性) 등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이를 못됐다고 비난하고 떠밀다니...

일상의 다른 영역들에서는 이런 일들을 보통은 부끄러워하고 비난하는 우리다. 인종차별은 닫혀 있고 갇혀 있어서 일어난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다름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다름인 단순사실조차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들은 ‘같음’, ‘획일’에 많이 빠져있다. 혹은 이쪽에서만 보아야 하거나 이쪽만이 볼 수 있다는 걸까?

방금 읽은 기사다. ‘갈수록 외모지상주의가 고착화되면서,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불만에 자해는 물론, 타인에게 묻지마 폭력까지 휘두르는 정신질환자가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A 씨는 지난 6월 충북 청주시의 한 길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B(여·24) 씨에게 물총을 쏘고 달아나는 등, 지난 4월부터 70여 차례에 걸쳐 여성들에게 오물이 든 물총을 쏜 혐의를 받고 있다. A 씨는 자신의 얼굴이 못생겨서, 여성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물을 뿌렸던 것으로 조사됐다.’

다름도 내적크기도 설 자리가 좁은 세상크기에서 2012년 어느 가을날에 일어난 일이다. 한쪽은 내모(內貌)에서 못 생겨도 환영받고, 한쪽은 내모에서 잘 생겨도 퇴짜를 맞는다. 예쁜 외모만 인정하니, ‘못생긴’ 외모의 여자들과 남자들은 취직하기도 결혼하기도 친구 되기도 어렵다. 쉽게 말해, 살기 어렵고 사람이기 어렵다는 뜻이다.

살기 어렵고 사람이기 어려워 쌓이는 스트레스의 분출구와 탈출구가 ‘묻지마 오물총’의 조준과 발사이다. 온 세상이 이런 문화 아닌 문화 속에 젖어있으니, 조준할 표적을 고정하기는 어렵다. 쏘기는 해야겠고 표적은 헛갈리니, 궁여지책으로 닥치는 대로 쏜다. 물론, 이런 행위는 잘못이다. 함께 사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잘잘못만 따질 것이 아니라,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더 대-들고’ ‘더 따져야’ 한다. 웃을 일도 아니고, 울을 일도 아니고... 아니, ‘웃으면서 울을 일’? 이 사회가 작은 ‘외모크기’가 죄(罪)가 되고, 자타에 해(害)가 되는 세상이라면, 안타깝고 착잡(錯雜)한 일이다.

결혼, 취직, 사교에서 배제되는 못생긴 사람들의 삶은 거의 사람다운 삶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질크기 하나와 결합되는 외모지상주의에서 내모도 배제되고 ‘일제(一齊)의 제일(第一)’인 외모와는 다른 외모도 배제된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물건쯤으로 부정(否定)되고 배제(排除)되면서 이들의 ‘사람크기’는 크게 작아진다. 부정은 ‘아니다’, ‘안 된다’라고 하는 판단이고, 배제는 밖으로 밀어냄, 떼어냄이다. ‘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나누고(2) ‘아니다’ 하면서, 나누며(1) 함께하는 삶의 ‘밖’으로 밀어내고 떼어내려 한다.

사람은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서, 이들은 나누며 함께하는 삶 ‘안’에서 같이 살아가기가 어렵게 된다. 밖으로 밀려야 할 사람들이 그래도 안에 남아있으면, ‘아니다’하고 못살게 눌러댄다. 놀리고, 때리고, 빼앗고, 내몰고, 죽이면서 일종의 왕따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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