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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교수의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整合性(정합성)』 下광개토태왕비문의 진면목을 세상에 알리고 『환단고기』의 위서론을 잠재우는 계기

아홉째, 무술등본을 통해 고구려군이 대마도를 거쳐 구주에 상륙하여 九州의 始羅城 都城을 함락하고 瀬戶內海를 거쳐 淡路島에 이르고 左軍은 담로도에서 但馬로 진격하고 右軍은 難波를 거쳐 武藏에 이르렀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환단고기』도 태왕이 바다를 건너 倭人을 격파하여 任那·伊·倭를 모두 신하로 삼았다고 하여 두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이 부분의 광대토대왕비의 복원된 내용의 번역분과 복원된 원문을 살펴보고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0년 경자(400년)에 전교를 내려 보군과 기병 5만을 보내가서 신라를 구원할 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적이 그 가운데 가득차 있다가 관병이 바야흐로 이름에 왜적이 물러가니라. 관병이 (도망간) 자취를 밟아 바다를 건너가 협공을 하면서 등 뒤로 가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대마도)의 從拔城(鰐浦)에 이르니 성이 즉시 귀순하고 복종하니 안라인으로 지키게 하니라. 시라성(九州 大隅國의 始羅城, 지금의 鹿兒島縣의 姶良郡이 옛 始羅郡이다. 또 고대의 姶羅郡은 현재의 鹿屋市부근을 가리킨다)과 都城(宮崎縣남쪽의 都城)을 함락시킬 때 왜적이 성에 가득했으나 왜적이 무너지니 성이 여섯 번이나 우리의 공격을 받고 탕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죽은 자가 10명 중 8, 9명이고 모두 신하가 되어 이끌고 오니 안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滿□□ 왜적이 감히 싸우려고 하여 㖨己呑, 卓淳(지금의 博多)의 여러 적들과 함께 □□을 도모하다가 관병이 기선을 제압하여 곧장 탁순을 취하고 좌군은 淡路島를 거쳐 但馬(兵庫縣의 북부, 현재의 豊岡市, 養父市, 朝來市, 香美町, 新溫泉町구역)에 이르고 우군은 難波(지금의 大阪)를 지나 武藏(近畿 동쪽, 지금의 東京都, 埼玉縣, 神奈川縣의 일부)에 이르고 왕께서는 곧장 筑斯(築紫, 북구주)에 이르시니 모든 적들이 다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나누어 郡을 만들고 안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十年庚子에 敎遣步騎五萬하야 往救新羅할새 從男居城으로 至新羅城하니 倭滿其中이라가 官兵이 方至에 倭賊退하니라
이 하야 來背하야 急追至任那加羅 從拔城하니 城卽歸服하니 安羅人으로 戍兵하니라.
拔始羅城 都城할새 倭滿倭潰하니 城이 六하고 라 하니 九오 盡臣來하니 安羅人으로 戍兵 하니라
滿□□에 하야 㖨, 淳, 으로 謀□□라가 이 하야 하고 은 하야 하고 은 하야 하고 은 하시니 이 潰라 하고 羅人으로 戍兵하니라.) (□속의 글자가 眞實된 글자이다.)

 

열째, 태왕비에 고구려는 일본에서 성을 함락하고 安羅人으로 戍兵케 하였다고 하였다. 현재 국내외의 모든 학자들이 安羅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는데 기존 강단사학자들의 견해는 ㉠ 安羅를 咸安으로 간주하여 과거에 일부 논자들은 任那日本部의 傭兵으로 해석하여 왔다. 즉, 왜가 장기간에 걸쳐 가야를 점령했다는 근거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 羅人을 신라인으로 보아 신라인을 안치하여 把守兵으로 삼았다. ㉢ 羅人은 任那加羅人으로 임나가라 사람을 안치하여 파수병으로 삼았다. ㉣ 고구려가 邏人 즉 巡邏兵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안라인은 고구려 卒本에서 일본에 이주하여 구주의 아소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일찍부터 친교를 맺어 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는 함락한 지역의 치안을 안라인에게 맡겼는데 이러한 내용은 환단고기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환단고기』는 어떤 사서보다도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眞書중의 眞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 논문이 광개토태왕비문의 진면목을 세상에 알리고 『환단고기』의 위서론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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