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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 사실의 왜곡과 실체

김삼웅(현대사 연구가)
前 독립기념관 관장

 

최근 김원봉에 대한 서훈과 관련 재평가운동이 전개되면서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세력이 그의 월북 이후의 행적과 관련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로동상, 무임소상,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모두 권력 실세와는 거리가 먼 위치였다. 그는 끝까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발굴한 자료〈푸자노프 일지〉(1958.10. 27)에 따르면 “김달현(천도교 청우당 대표)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회의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푸자노프 일지〉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가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평양 주재 당시 당ㆍ군ㆍ정의 고위 간부들을 자주 만나 북한 내부사정을 청취하고, 그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1950년대 북한과 소련의 관계에서, 특히 평양주재 소련 대사의 위상으로 보아 근거 없는 정보를 청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창현 소장에 따르면 김원봉은 1958년 9월 중순 청우당 당수인 김달현 숙청 때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분석한다. 다음은 1958년 10월 1일자〈푸자노프 일지〉의 내용이다.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회의에서는 상(각료ㅡ필자)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전환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김원봉의 모습, 사진출처=BBC뉴스 화면 캡쳐

 

김원봉은 이후 북한사회의 공식문서나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납북ㆍ월북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양미리의 애국열사능에도 묻히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누구보다 가장 강력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해서 그의 목에는 가장 많은 현상금이 붙었고, ‘현장사살’의 명령까지 내려졌다. 일본 외무상은 “김원봉 체포 시 즉각 사살하거나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경비는 얼마든지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보냈다.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은 7년 동안 전후 23차례의 거사를 통해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정신을 내외에 과시했다. 조선의용대(군)가 갈려져 다수가 공산당 진영인 옌안으로 향할 때 그는 소수 대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그리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해방 후 환국하여 노덕술과 같은 일제경찰 출신의 쓰레기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몇 차례 테러위기도 겪었다.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면서 그는 ‘살기 위해 죽을 곳’으로 가야만했다.

우리나라의〈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도록 하고 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람에서 빠진다면 과연 법정신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약산을 “6ㆍ25의 원흉”, “6ㆍ25남침의 핵심역할” 등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당시 당이나 군, 정부의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었다.

또 “전쟁 시 국군을 많이 죽여 훈장을 받았다”는 그들의 주장 역시 허구에 불과하다. 1952년 3월 19일 공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니라, 김원봉이 1951년 북조선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 재직 시 평북지역의 보리파종 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 ‘로력훈장’이다.

북한 통치 이데올로기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한 외교가이고, 북한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의장, 주체사상연구소장, 노동당비서, 노동당국제담당비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황장엽이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진 황장엽의 묘


 
한때 북한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전주대학 석좌교수 등 예우를 하고, 이명박 정부는 2010년 그가 사망하자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장례위원장을 맡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독립운동은커녕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체사상가 황장엽에 대한 최상의 예우였다.

독립정쟁의 영웅 김원봉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이고,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무궁화장을 받은 애국자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건전한가, 묻고 싶다.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김원봉 선생이 저승에서 일본이 재침략 야수성을 드러내고, 조국광복 74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자신에 대해 온갖 험담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어떤 심경일까. 러시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1893~1930)의 시구와 같지 않을까 싶다.

 나는 원한다.
 조국이 날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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