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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신규식 선생의 한국혼≪續≫

예관 신규식(1879-1922)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병탄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에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수립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국무총무대리.외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 내의 통합에 노력헀다. 


『한국혼』은 예관 신규식이 나라를 잃어버림에 대한 분통한 외침, 즉 통언으로써 만든 저술이다. 신규식은 이 『한국혼』을 통해 대한제국이 망하게 된 이유를 말하며 그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신규식의 교화란 단군의 이신설교와 제천보본이며 종법은 세속오계를 뜻한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선민들이 공렬과 이기를 잊어버렸음을 지적한다. 세 번째는 역사를 잃어버리고 역사를 망각해온 우리 자신의 잘못이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몰라 국치마저 몰랐음을 이야기한다. 

...신규식은 『한국혼韓國魂』(1914)이라는 글에서 “아아, 우리나라는 기어코 망해버리고야 말았구나. 가령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도 죽어버리지만 않았다면 비록 지도가 그 빛을 달리하고 역사가 칭호를 바꾸어 우리들의 대한이 망하였을지라도 우리들 사람마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혼≪續≫은 신규식 선생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한국혼≪續≫

睨觀 申圭植 遺稿

 인재가 이미 모두 박해를 받아 사라져 버렸는데, 이기 또한 온전한 보존을 바랄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글을 써내려오니 마음이 아파 미칠 것만 같다.

 博浪의 사막에서 진시황에게 가해진 철추, 무등산의 희고 푸른 기운이 서린 왜구를 목베던 칼, 박서(朴犀)가 몽고를 격파하던 砲車와 鐵液, 조언(趙彦)이 평양을 평정할 때 쓰던 砲機와 火球, 朴절도사 의장의 震天雷, 김시민(金時敏)의 玄字銃 등은 세월이 오래지나 남겨진 것이 없고, 3백 년 전 우리나라에서 세계 처음으로 만들었던 철갑선과 飛行車(비행거의 역사는 신경준의 『飛車說』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도 또한 흙을 버리듯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

 권세 때문인가? 나라가 망했는데 벼슬이 무슨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금전 때문인가?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무너졌으니 금은보화는 적에게 양식을 보태어 줄 뿐이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총명함을 가로막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장성이 스스로 무너지니 오랑캐들이 활개를 치는구나. 죄 없고 무고한 백성들은 도마 위에서 목숨을 애걸하고, 독사 밑에서 고통스럽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서리가 쌓이다 보면 굳은 얼음이 되는 것이니, 나라가 쇠하여 모욕을 당함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총이며 칼을 모조리 빼앗기고 난 뒤에 오랑캐들의 난폭함을 통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돌이켜 보건대 백성들의 기운이 여러 차례 꺾이었음에도 오랑캐를 두렵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한성의 棍棒戰, 평양의 石塊戰과 湖中의 手搏戰이라. 그 밖에도 씨름 · 높이 뛰어넘기 · 줄다리기 등등은 원래 민간의 유희이지만, 여기에는 상무정신이 깃들어 있음이 엿보여 아직 우리가 쇠약해 빠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우리가 강해지는 것을 꺼려하는 자들에 의해 금지되고 말았다. ‘자유’라는 두 글자는 망국인의 자전 속에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나라의 역사를 잊었다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나라의 문헌은 곧 나라의 정신이다문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국사에서 찾아야 한다. 슬프도다! 우리 한국은 이제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것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경적과 문자는 여러 차례 화를 당하였다첫 번째는 당나라 총관 李世勣이 사고를 불태워 버린 것이고, 두 번째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사를 제멋대로 깎아버린 것이다. 세 번째는 甄萱의 군대에 의하여 신라의 경적이 모두 불태워진 것이며, 네 번째는 燕綰의 난으로 箕子의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檀君史』『檀朝史』, 『神誌書雲觀秘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表勳天詞』, 『志公記』, 『道證記』, 『動天錄』, 『通天錄』, 『可華錄』, 高興의 『百濟史』, 李文眞의 『高句麗史』, 居柒夫의 『新羅史』, 『渤海史』 등은 그 이름만 남았을뿐, 그 책은 얻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조국이 이미 쇠잔해지고 국학이 날로 명맥이 끊기게 되어 후세의 역사가들은 나라의 독특한 정신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조종을 멸시하며 외국에 아첨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에 관계된 문자, 전장제도와 법도의 변천과 이해관계를 궁구함에 참고할만한 것을 없애버린 것이 많고, 심지어 고래의 史冊 가운데 타국을 지탄하고 배척한 것이 있으면 이를 고치거나 삭제해 버렸다. 또한 옛날 도의를 교화시키던 경적의 내용 가운데 국수적인 요소가 남아있는 것은 모두 이단이라 하여 빼어 버리고 싣지 않았다.

 적을 토벌하여 땅을 넓히는 것을 悖道라 하였고, 이웃 나라를 사귐에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것을 지켜야 할 본분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독특한 정신을 망각하고 외국에 아첨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수많은 책들은 단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노예문서일 뿐이다. 그들은 또한 타인의 저술 가운데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면 이를 억눌러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에 급급하였다.

 한편 兵事類의 서책으로 『兵學通』, 『武藝譜』, 『演機新編』, 『爲將必覽』 등과 傳記類인 『三韓二十四傑)』, 『新羅殊異傳』, 『角干先生實記』, 『李忠武公全書』, 『海東名將傳』, 地理圖類의 『輿地勝覽』, 『擇里志』, 『山水經』, 『道里表』, 『我邦疆域考』, 『大東輿地圖』, 『大東列邑地圖』, 『靑邱圖』, 『槿域圖一覽』 등과 國語文類의 『訓民正音』, 『東言解』, 『東言考』, 『訓民正音圖解』 등과 『萬機要覽』, 『星機運化』, 『人政』, 『天學考』, 『外國風土誌』, 『海東諸國記』 등 서적은 태반이나 없어지고 말았다.

 또 근세의 李瀷, 丁若鏞, 柳馨遠, 朴趾源 등 선철들이 찬술한 역시 · 지리 · 정치 · 학술 등에 관한 여러 위대한 논술과 걸작들도 모두 세상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韓大淵의 『海東繹史』, 申景濬의 『飛車策對』, 李景奎의 『五洲衍文』, 尹宗儀의 『闢衛新編』 등은 늦게나마 지금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새로운 역사의 조류가 힘차게 흐르고 있는 시대에 태어나 외래의 심한 자극을 받아, 옛날의 문헌을 끌어내어 조종을 추념하고 선열들을 빛내고 후인들을 격려하려고 하여도, 온전한 것이 거의 없고 모두가 이름과 조각만 남아 있을 뿐 완전한 것이 없구나! 이리하여 혹은 외국의 기록을 빌어 우리의 옛 자취를 엿보려하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그나마 흩어진 것을 모으고 없어진 것을 살펴, 그 속에서 참뜻을 찾으려고 애쓰는 자는 새벽하늘의 별과 같이 드물구나!

 근년에 몇몇 사람들의 번역물 가운데는 살펴볼만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다만 史說을 찾아 인용함에 그쳤고, 그 당시의 잘못된 기록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빠진 것과 잘못된 것이 있음을 또한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대개 문헌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믿을만한 역사가 없었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중국을 떠돌면서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章炳麟과 같은 학자를 만나 보았다. 그마저도 한나라 때 현도, 낙랑, 임둔, 진번의 4군을 설치한 것이 다만 위만이 할거하고 있던 한 모퉁이의 땅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대동강 이남에는 이전과 같이 여러 나라가 독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다문박식하다고 자부하는 梁啓超와 같은 사람도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우리나라를 “국문이 없는 나라이기에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등 사실에 맞지도 않는 논단을 내렸다.

 오호라!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모욕함이 이와 같더라. 그럼에도 나는 장병린과 양계초 두 사람을 탓하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사적은 이미 없어져 그들이 살필 수가 없고, 오직 漢書 가운데 나타나는 짤막한 역사와 몇 마디의 말, 그리고 일본인들이 벌여놓은 미친 소리와 허튼 수작을 그대로 옮기고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국사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변명할 것이며, 우리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슬프고도 슬프도다! 우리들이 모욕을 받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장병린과 양계초 두 사람은 필경 중국인이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식학문에 통달하였다는 사람들도 역사상 도읍의 건설을 말하게 되면, 능히 帝堯陶唐이 山西 平陽에 도읍을 정한 것은 알아도 신조 단군께서 平壤을 수도로 정한 것은 모르더라.

 또 나라를 다시 세운 사적을 말하면, 명태조 朱元璋에 대해서는 훤히 알아도 東明聖帝 高朱蒙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더라. 중국에서는 나무하고 소 먹이는 어린아이까지도 위수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이 부르던 노래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들까지도 위주에서 적을 무찌른 강태사를 아는 사람이 적다.

 한편 신지식을 깨우쳤다며 학자를 칭하는 사람들도 고적을 말하면, 마니산의 제천단은 모르면서도 이집트의 금자탑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새로운 기구를 말하면 鄭平九가 만든 飛機는 몰라도 몽골피에 형제가 발명한 氣球는 과장하여 말하더라. 인쇄술과 활자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독일과 네덜란드만을 말하지, 그보다 수백 년이나 앞서서 신라나 고려에서 인쇄술과 활자를 발전시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또 문장을 배우고 글귀를 인용함에 있어는 매번 李太白과 杜甫만을 숭상할 뿐, 우리 고유의 학설과 문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위인의 언행을 말할 때면 반드시 워싱턴이나 넬슨만을 언급할 뿐, 우리나라의 철인과 선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함이 없었다.

 나도 이태백과 두보의 문장을 아끼지 않는바가 아니고, 워싱턴과 넬슨이 이룬 업적을 숭배하지 않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동포들이 자기의 것은 버리고 남의 것만을 좇는 것을 원하지 않을 따름이다.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망녕되게 자기 스스로를 얕잡아 보는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어찌하여 책을 보면서도 조상을 잊어버리는 악습을 지금까지도 고치지 못하는지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아아!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을 말하려는 데도 부득이 남의 서적을 빌리고, 남의 말을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슬프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우리나라의 교화의 원류를 말하려면 부득불 『明史』와 『漢書』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明史』의 王弇州 續宛委餘編에는 “동방에 단군이 처음 나와서 신성의 교로써 백성을 신중히 가르쳐 대대로 강대한 족속이 되었는데, 그 교명을 부여에서는 代天敎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崇天敎, 고려에서는 王儉敎라 하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라고 하였다. 또한 『漢書』에는 “司馬相如가 한무제에게 “폐하께서는 겸양하시여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마시고 삼신의 즐거워함을 받으소서”라고 하였는데, 그 주해에 삼신은 상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遼史』, 『金史』, 『滿洲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遼史』에는 “神冊 원년에 永州 木葉山에 종묘를 세웠는데 동쪽 방향으로 천신의 위패를 마련하고 묘정에 檀樹를 심어 군주의 나무라고 일컫었다. 황제가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때는 반드시 먼저 종묘에 고하였다. 이에 신주를 세워 제사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金史』에는 “大定 12년 12월에 단군을 興國靈應王이라 높이고, 明昌 4년 10월에는 다시 開天弘聖帝를 추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滿洲誌』에는 “부여족의 종교로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다”고 쓰여 있다.

 이상의 사서에 기록된 것은 비록 짤막하지만 구슬과 같이 귀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글귀에 담겨진 소중한 뜻을 모르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 남들에게도 또한 이런 말이 있고, 그들의 역사책에도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고 지껄이는 사람이 없지 않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아! 우리나라 국민들은 만약 神人이 태백산 단목 아래 강림하였다는 한 줄의 기록이라도 없었다면, 아마 葛天氏의 백성이 되었거나 無懷氏의 백성이 되었을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만약에 환인상제의 말이 전해지지 않고, 마니산에서 행해진 제천행사에 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들도 또한 『詩經』, 『書經』, 『左傳』이나 신 · 구약 성서에서 말하는 것에만 의존하였을 것이다. 만약 星湖 李瀷과 茶山 丁若鏞 두 선생의 종교론과 삼신설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무턱대고 仙敎라고 자칭하는 巫術에만 매달려 영원히 무당들의 손에서 더럽혀졌을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옥새가 안휘성의 程氏 집에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신해년에 나는 程家檉 군을 북경에서 알게 되었다. 어느날 정 군이 “광개토왕의 옥새를 동삼성의 어떤 시골 노인한테서 얻었는데, 이를 대단한 보배로 여기고 있다”라고 하며 꺼내어 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손님들이 밀려들어 군은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吳祿貞 장군이 동삼성에 있을 때 한국의 고대 인장과 기물 몇 가지를 얻어 보관하고 있는데, 모두 진품이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나는 일 때문에 남쪽으로 떠나게 되었고, 훗날 다시 만나 광개토왕의 옥새를 구경하기로 약조하였다. 아아! 지금은 정가성과 오록정 두 친구가 모두 죽어버렸으니, 어디서 다시 그 인물과 그 물건을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인가?).

 만주에서 한국에 공물을 바친 것을 기록한 表文은 『宋氏遺錄』에서 처음 보았다. (宋敎仁의 筆記에는 “동삼성과 다른 여러 지역에 있을 때 滿淸이 아직 입관하기 전의 秘史를 많이 얻었는데, 지금은 모두 東京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만주가 고려에 공물을 바친 것을 기록한 표문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後金國奴才’라는 기록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奴才’라는 두 글자의 내력은 만주가 상국에 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후세에까지 그대로 전습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교인에게 그 자초지정을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송 군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봉천성에 있는 記功碑는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광개토왕이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수천리의 땅을 넓히고, 남으로 왜구를 정벌하여 신라를 구하였다고 쓰여 있는 이 비석은 지금 奉天省 · 輯安縣에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는 “恩澤이 皇天에 미치고 威武가 四海에 떨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그 자획이 힘차서 중국의 금석문연구자들도 한나라나 위나라 때의 글씨와 견줄만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탁본하는 자가 대단히 많다.

 明石浦의 白馬塚은 왜인들이 그렇게 지칭하여 나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金世濂의 『海槎錄』에는 “日本年代記에 應神天皇 22년에 신라가 明石浦를 정벌하여 왔는데, 이곳은 大阪에서 겨우 백리 밖에 안 되는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고 하였다. 또 赤關 동쪽에 언덕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이를 가리켜 “이것은 白馬墳인데, 신라병이 일본에 깊숙이 침입하여 일본이 화해를 청하자,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그 피로써 맹세를 하고 그 말의 머리를 이곳에 묻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申叔舟의 『海東諸國記』에는 “신라 眞平王 4년, 즉 일본 敏達天皇 20년에 신라가 왜군을 서쪽 변방에서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順庵 安鼎福은 “지금 동래 앞바다 절영도에는 오래된 보루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신라 태종이 왜를 정벌할 때에 쌓은 것이라 하여, 그 까닭에 太宗壇이라고 칭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는 우리 해군사의 뛰어난 위인을 말하려면 일본사를 인용해야 하고, 우리의 철갑선을 언급하려면 영국인의 기록을 보아야 하는 지경이다. 심지어 우리글의 간편함을 말하려 해도 미국 선교사들의 말을 빌어야 하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우리의 문헌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은 누구의 죄인가?

 나는 이제 큰소리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고하노니, 중국사, 요 · 금사, 만주사, 일본사, 영국사 등은 원컨대 이를 모두 갖추도록 하라. 만약 그 당시에 그들이 대신하여 기록함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우리 조종의 교화와 종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또 우리 선민들이 세운 위대한 공적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우리가 자신의 역사와 어문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어리석고 깨우치지 못함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심한 것인가? 우리는 5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 나아 이 땅에서 성장하였고, 이 땅에서 입고 먹고 하면서 버젓이 나라를 세워 다른 나라와 자웅을 겨루었다. 예의 있고 덕망 있는 인물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의 역사를 빛내고 면면히 대를 이어올 수 있었겠는가?

 만약 다른 나라가 대신 기록해 준 것마저 버렸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은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그러니 국사마저 잊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대로 오랫동안 흐리멍덩하게 지나게 되면,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얼마 안 되는 기록도 머지않아 남김없이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군의 자손이니, 부여민족이니 하는 것은 망한 나라의 대명사로 타국의 역사에만 남을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는 ‘대한’이라는 두 글자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슬프고 아프다! 雅亭 李德懋는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龔仁和는 “남의 나라를 멸하고, 남의 터전을 흔들어 남의 인재를 끊기도록 하고, 남의 교화를 없애버리며, 남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남의 조종을 헐어버리면 먼저 그 역사를 없애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아! 우리 동포들도 오늘에 이르러서야 또한 이 말이 얼마나 통절한 것임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아아! 우리들은 신명의 자손으로 다함께 생을 타고 낳고, 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토록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렸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다고 어찌 완전히 멸망하여 없어지는 것을 감수할 것인가?

 錦頰山人은 河東의 썩은 뼈를 꾸짖으면서 大東의 역사를 썼고, 曲橋少年은 서산의 기우는 해를 탄식하면서 光文會를 만들었으며, 弘巖羅子는 대종교의 이치를 밝히고, 周時經 씨는 조국의 언어를 연구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도는 외롭지 않아 이처럼 다행스러운 일이 있는 것이니, 바라는 바는 그것을 이어 받을 사람들이 나타나서 서로 돕고 호응하여 준다면, 이것이 망한 것을 뉘우치는 하나의 징표가 되어 족히 장차 죽어가려는 인심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얼을 불러일으켜 없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아아! 동포들이여! 지금은 어떤 때인가? 노예 밑의 노예가 되었고 옥중의 옥에 갇힌 신세가 된 때이다. 그래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흐리멍덩하고 태만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면, 망국의 죄를 덮어 감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멸종의 화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나 자신도 理學은 마땅히 숭배해야 하고, 또 철학도 마땅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오늘과 같은 세대에 태어나서 치욕을 씻고 죽음에서 헤어 나오기에 겨를이 없는 때에, 인성과 천명을 들먹이다가는 언제 사물을 분석할 시간이 있겠는가?

 내가 가장 경애하는 선배학자들과 선진학도들이여! 朱子에게 두 무릎을 꿇고 감히 스스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것은, 겨우 남이 뱉은 침을 핥는 것에 불과하며, 온몸을 신문학에 적시는 것은 그 껍데기를 알기도 전에 자신의 영혼을 장사지내는 것과 다름 없다. 원수가 아직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朱子의 죄인이 될까 두려워하며, 문명을 몽상만 한다면 끝내 서양인의의 좋은 벗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제군들이여! 한 번 곰곰이 생각하여 볼 일이다.

끝. 


신규식 선생이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우리 역사 문헌.. 우리 역사와 정신을 온전히 다룬 문헌이 찾아져서 다행이다. 신규식 선생은 천상에서라도 기뻐하실 것이다. 다만 그 역사가 진짜 모든 국민이 배우고 인정하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아직 역사광복이 남아 있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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