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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유림 송기식과 이유립 선생의 오랜 인연

해창 송기식 선생은  석주 이상룡, 동산 류인식과 함께 혁신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외세 압박에 스러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고 신학(新學=西學) 조류에 밀려 구학(舊學)으로 내몰리던 유교를 부흥하는 일을 시대 소명으로 여겼다.

1933년 명교학원 제1기 수료생들이 녹동서원 앞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첫째가 송기식. 출처 : 월간중앙

그래서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봉양서숙, 인곡서당 등을 건립해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섭렵해 유교 근본 취지에 충실하고도 시대에 어긋나는 것은 과감하게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교개혁 사상은 유교 유신론(1921)에 집약되어있다.

안순환은 유림의 지지를 받는 ‘조선유교회’를 조직하고 녹동서원에서 인재를 가르칠 석학을 팔도에서 찾았는데 유림의 본거지 안동에서 추천받은 인물이 해창 송기식 선생이었다. 해창 선생은 1932년 녹동서원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녹동서원의 명교학원은 수업은 유학적인 내용이 주류였으나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셨다. 

녹동서원은 1933년 ‘명교(明敎)학원’이란 이름으로 인재 20명을 전국에서 골고루 선발했다 정식명칭은 '조선유교회강학소'로 1기생 20명과 함께 입교한 이가 바로 이유립 선생이다. 선생은 6개월간 '경학, 유교철학, 문학사, 종교학, 윤리 및 심리학' 등을 배우게 된다. 

"선생의 일생에서 도약기를 꼽는다면 아마 서기 1930년 초반의 청년기에 입경(入京)하여 입회한 안순환이 세운 명교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가전(家傳)한 많은 서책의 섭렵과 운초, 벽산, 단재의 사관을 기초로 비로소 경향 각지의 학자들을 만나 폭넓게 교류하며 민족주의 사관 정립과 바른 국사 찾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석주의 대동광의, 해학의 유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학구하는 한편 조선유학회 기관지 일월시보 주필로 활동하며 대종교와 단군교의 조직과 활동을 주시하고  장차 단학회의 재건을 모색하였다." - 양종현, <백년의 여정>

해창 송기식의 해창문집 속에는 환단고기를 전수한 이유립 선생과 주고받은 서신이 정리되어있다.  송기식 선생은 5대 단학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와 동문수학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도 단학회 간부를 맡았다. 5대 이용담 선생이 단학회장일때 송기식 선생이 명예회장, 이정보,이유필이 고문이었으며 윤창수,이병걸,이유항,김찬정,이석영이 간사였다. 송기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유립과 이석영이 만사를 쓰기도 했다. 

송기식 선생의 글을 담은 해창문집에는 이유립에게 보낸 편지와 글들이 다수 남아있다. 

▶해창문집 01 

이유립의 「혈구재」 시에 차운하다[次李裕岦絜矩齋韻] -301

柳星巖 ( 東翼 )來訪共賦 次朴明遠 ( 昶魯 )晬辰韻 輓朴醒軒 ( 淵祚 ) 輓金公( 得鍊 ) 次黃滄江 ( 斗根 )晬辰韻 次金牧山 ( 炳玹 )見贈韻 輓邊聖和 ( 鎔範○壬午) 七月十五日與諸君共韻 留大谷 崔東奎連夜來訪, 感其意, 贈一絶 輓東邱李公( 濬衡 ) 敬次先祖松亭公墓所設壇韻 次李裕岦 絜矩齋韻

☞ 李裕岦絜矩齋韻
胸中一矩成, 用處萬方生, 本末分開物, 綱條裏許名, 潛收宗靜 色, 飽聽鴨江聲, 莫作尋常過, 發爲仁智情. 


이유립이 「자각명」을 지어서 보여 주니, 매우 가상하여 감회를 엮어서 주다[李裕岦作自覺銘示之 甚嘉之 綴其餘意以贈之] -244

始興途中次諸生韻 終南山次金蘆洲 ( 永毅 )述懷韻 次權何山 ( 炳洛 )晬韻(幷序) 與趙石霞 ( 炳善 )率諸生至鷺梁津口號 五月十二日行渡漢江橋 登冠嶽山 衿芝峯 謁檀聖廟次殿閣韻 李裕岦作自覺銘示之, 甚嘉之, 綴其餘意以贈之 同趙石霞金蘆洲率諸生遊盤泉亭 次懷仁殿奉安韻 輓李公( 基榮 ) 輓溪山李擎一 ( 景求○甲戌) 

敬美閣記辛巳
朔州郡 新豊里有敬美閣, 卽孝子淸菴李公之閭也. 蓋公有出 天之孝, 又推而有救時之功, 降後百五十餘年, 近郡儒林以爲 風敎所樹, 不可湮沒, 是掌化家之責, 乃自首善之地, 發議而立 石曰紀績碑. 本孫感其公議之鄭重, 又立閣以除風雨, 閣壽于 石也, 石壽于公也, 所以動風化而勸來世也. 旣有春沙之狀, 東 湖之銘, 皆足以徵後, 而但記述諸文字, 不可人人得而讀之, 不 若巋然有閣, 至使婦孺之過者, 人人得而式之, 其一式之間, 生

於其心, 發於其事, 則詩所謂孝子不匱, 永錫爾類者, 不其廣且 遠乎. 然則不徒壽于石也, 將厚待後人而不窮矣. 余友李裕岦 致書數千里來曰, 吾先祖事也, 執事記之. 余惟吾鄕亦有襄憲 公之裔, 爲南省之巨室, 嘗曰, 朔州有族千有餘戶, 以文行世傳 云矣. 今於是役果驗, 然以寥寥之筆, 何足爲風化之助. 第以秉 彝所同, 冒昧搆拙, 以塞慈孫之請.

▶해창문집 02 

☞이유립에게 답하다[答李裕岦] 갑술년(1934) -23

答李裕岦(1934)
이유립에게 보낸 답신이다. 복일례(復日禮)를 수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유립 쪽의 상황을 물었다. 성인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것을 힘쓰되 오랜 시간을 거쳐 지속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유립에게 답하다[答李裕岦] 계미년(1943) -24

答李裕岦(1943)
이유립에게 보낸 답신이다. 항상 平坦한 글과 평상을 도리에 마음을 쓰라고 권하고 있다. 「장자莊子」를 읽고 자연自然에 대해 체득한 것이 있다고 하고, 또 「주역周易」의 구절을 들면서 정신을 보존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어 가장 유념해야 할 공부처(工夫處)라고 하는 내용도 보인다 

與崔俊八
최준팔에게 보낸 편지이다. 李裕岦의 교육사업이 틀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기백이 대단하다고 칭찬하였다

▶해창문집 03 

☞또[又] 이유립李裕岦 -244
☞또[又] 이유립李裕岦 -306

이유립 선생은 송기식 선생이 돌아가시자 죽음을 애도한 만사를 썼다.

이유립과 더불어 이석영 선생도 송기식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를 썼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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