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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여성 독립군 김성녀 여사 봉오동전투를 증언하다

김성녀 여사는 북간도 독립전쟁의 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한 여성 독립군이다. 식사 준비와 군복제작 등을 맡아 함께 부대 운영을 했던 김성녀 여사는 수천 명에 이르는 봉오동 독립군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그녀는 후손들에게 몇 천 명 달하는 독립군의 식사 준비와 대규모 살림살이에 대해 들려주었다. 

각 부대별로 장류나 부식을 배급해주었지만 늘 수십 명, 수백 명이 함께 식사를 했고 어떤 날은 한 끼에 3000명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봉오동전투 당시에 독립군의 본부가 산 정상에 있을 때 중요한 첩보가 도착하면 중요한 기밀을 남에게 맡길 수 없어 주야불문, 목숨을 걸고 산위에 있는 부대 본부에 직접 전달하는 등 비밀첩보에도 동참하였다. 

김성녀 여사가 부산에서 생존할 때 최운산 장군의 부하였던 독립군이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매일 우리 독립군에게 밥을 해주시고, 군복을 지어주시고, 독립군들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주신 이 분이야말로 훈장을 받으셔야할 진짜 독립군이시다”고 감사를 전했다. 

1961년 1월 최운산 장군의 건국훈장 서훈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총무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당시 담당직원은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아들 최봉우는 그 직원에게 주먹을 날렸고 최운산의 서훈은 취소되었다. 재신청이 계속 거부되자 김성녀 여사는 1969년 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살아생전 최운산 장군 3형제의 항일 무장투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진정서(김성녀) 

“본인은 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제수이며, 도독부, 독군부의 창설자이며 참모장으로서 모든 군자금을 맡아 조달하였으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진동 장군의 친제인 최운산(일명 만익)의 미망인이며, 도독부 독군부의 지략가이며 작전참모였고, 최진동장군과 최운산의 친제인 최치흥(일명 명순)의 형수 되는 사람입니다.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도독부 독군부를 창설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신 분들의 공적이 사록에 누락 및 오기된 사정을 시정코저 하오며, 물론 독립 운동한 것은 개인의 명예욕에서 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국민과 후손들에게 최진동 3형제의 혁혁한 독립운동 투쟁사를 사실대로 명백히 밝히고자 아래와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나이다.

1. 최진동 장군은 1963년 3월1일에 독립유공훈장 단장(제374호)을 수여 받았음, 
최진동 장군의 공적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에서만도 수십 페이지에 달하도록 공적이 수록되어 있으나 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복장이나 중장을 수여받고 있기에 사실을 공명코저 하오며, 모든 공적을 사실과 동일하게 남기고자 하오며 품격의 승격도 원하는 바입니다. 

2. 최운산(일명 만익)은 1961년 1월 29일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대통령 포장으로 결정되었다고 총무처로부터 통보받은 사실이 있으며, 1968년 2월 12일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다시 심사하여 보류되었으며, 1969년 12월 17일에 총무처에 사료를 보완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공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과 공보처 발행 무장독립운동비사 및 대지의 성좌 제1부 망명지대와 애국동지회 발행 한국독립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최치흥(일명 명순)은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회 발행) 및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이다. 

이와 같이 최진동 장군을 위시하여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시었는데, 조국광복을 맞아 독립운동 당시 하급지휘관 및 졸병으로서 생존한 독립인사가 자신의 공적을 과대 선전하기 위하여 허무맹랑한 사실과 왜곡되고 과장된 조작 사실로 인하여 독립운동사에 오점을 남겼으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사록에 수록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반드시 사학가들에 의하여 사실이 입증되리라 보며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코자 합니다.

“가. 북만주 지역에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으나, 그 단체들이 왜 통합을 하여야 했으며, 통합 후에는 누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통합 후에는 누가 자금을 지원하였는가요?

나. 북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당시 누가 거처와 모든 장비 및 피복, 식량과 모든 군자금을 제공하였는가요?

다. 일본군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라 하는 왕청현 봉오동 일대와 서대파는 누구의 소유였는가요?

라. 도독부, 독군부에서 사재를 투입하여 서대파에 군정서 겸 군사교련소를 창설한 사실을 알고 계시며, 창설 당시 자금은 누가 조달하였는가요?

마. 한국에서 북만주로 독립운동을 위하여 입만 하신 분 중에 누가 자금을 가지고 들어가셨던가요? 유일한 분으로서는 이시영 선생(2대 부통령 취임한 분)이시며, 그 외에는 북만주에 거주하는 교민의 도움으로 지탱하였고, 그 외 자금은 누가 지원하였던가요?”

본인은 이상과 같은 사실의 진부를 가려서 한국독립운동사의 오점을 시정하고,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신 최진동장군 3형제의 명예를 위하여 흑백을 가려서 모든 역사의 산 증거에 의하여 사실대로 밝히고자 하여, 여러 사학가 제씨들에게 호소하며, 자에 진정서를 제출하나이다.” 

최운산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가 전하는 당시의 전황을 다음과 같다. 

봉오동 전투 전황戰況 

봉오동전투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봉오동을 독립군의 책원지策源地라 하여 격멸擊滅코저 하다가 도리어 그들이 대패한 전투였다.
 
서기 1920년 5월 중순 일본군 신미이랑이 지휘하는 남양수비대 및 안천소좌가 지휘하는 제19사단 일부 약 1개 연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서 독립군의 본거지인 독립군을 내격來擊한다는 정보를 미리 탐지하고, 독군부 사령부에서는 봉오동 주민을 미리 전부 대비시키고 사령관 최진동 장군을 위시한 참모들과 특별부대인 이원부대는 사령관 본부를 봉오동 상위에 있는 봉초봉에 위치하고, 제1연대 연대장 김좌진 장군은 봉오동 서쪽에 위치해 있는 초모정자산에 연대본부를 두고, 제2연대장 홍범도 장군은 남봉오산정에 연대본부를 두고 제3연대 연대장 오하묵은 사령본부 후방인 장골에 예비부대로 연대본부를 두고 위치해서 적군이 진입예상에 각각 매복 부대를 배치하고 있던 중 1920년 6월 7일 새벽을 기해서 일본군이 봉오동을 기습해왔다. 

독립군은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사방에서 완전 포위하여 적군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다음과 같은 전과를 거두었다. 

- 적군 射殺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
- 노획물자는 1. 대포 4문,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백여 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를 노획했다.

이상과 같은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수십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일본군은 1920년 7월7일 새벽 6시 30분에 고려령 서편 약 1,500m 고지에 도달하였다. 이때 아군 독립군은 사면에 매복해 있던 전위중대가 접근하기를 기대하여 급반격으로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시켰다. 매복부대는 본대에 귀대했고 적은 비파동을 경유해서 유원진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적은 그곳에서 재정비하여 가지고 다시 同月 同日 오전 11시 30분경 적의 보병부대가 봉오동 상촌에 도달하였으나 아군은 더욱 매복하여 잠복부동하니 적의 전위대가 통과하고 그 후 적의 本隊가 아군의 매복한 삼면포위 중에 완전 진입한지라, 차제此際에 봉오동 상위하여 사방으로 도주할 때 봉초봉에 위치해 있던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응전(사격개시) 지휘 총성에 의하여서 맹렬히 급사격을 가하였다.
 
적은 완전 포위되고 不意 습격을 당하여 당황하여 殺傷者 重輕傷者 逃亡者 등으로 혼란 제2중대장 강상모는 적의 후방에 부하 중대원을 인솔하고 맹렬히 진격하여 적군 십여 명을 사살하고 基地點에 부하 중대원을 매복시켰다가 적의 지원부대(本隊)에 약 1,000발의 사격을 가하여 교묘히 적진을 돌파하여 아군부대로 귀대했다.
 
일본군은 불순한 日氣와 폭우로 인하여 彼我를 분별할 수 없는 관계로 양편에서 진입하던 일본군을 서로 난사하여 독립군을 사살하려다가 적은 많은 살상자를 내게 됨에 따라 적은 대패하였고, 苦千은 온성 유원진으로 행하여 패주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성녀 여사는 최운산 장군의 서훈을 보지 못하고 1975녀에 돌아가셨다. 1977년에야 최운산장군의 서훈이 결정되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김성녀 여사가 최운산 장군과 함께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을 함께 건설하고 지켜낸 수천 만주독립군들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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