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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봉오동전투 승리의 재조명

그동안 한국의 미디어가 보여주는 만주의 무장투쟁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에 관한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은 모두 신흥무관학교에서 한 것이라 생각한다. 

본격적인 독립전쟁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잘 모르지만 신흥무관학교와 이회영 형제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다. 오랜 세월 미디어를 통해 접한 무장투쟁 관련한 콘텐츠는 대부분 서간도와 신흥무관학교에 편중되어 있었던 탓이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압록강 건너편이 서간도이고 두만강 건너가 북간도라는 것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서간도는 조선인이 많이 없었고 북간도는 주민의 90%이상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환경의 차이는 무장독립운동의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 형제들과 이상룡 일가가 중국인들의 견제를 받으며 서간도 유하현에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세우고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북간도의 봉오동에는 이미 무장력을 갖춘 부대가 있었다. 

국내의 한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는 마을공동체가 있었고, 그 신한촌을 지키기 위한 자위부대가 존재했다. 이 사실은 ‘헐벗고 굶주리는 만주 독립군’, ‘춥고 배고픈 황량한 만주벌판’이라는 만주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풍요로운 마을 봉오동은 독립군이 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애국청년들을 품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동안 몇몇 다큐는 일본군이 습격해오자 홍범도 장군이 급하게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장면을 재현하고, 봉오동댐 위에 올라가서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모두 댐 속에 잠겨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그 댐에서 10km 정도 산속으로 더 들어간 곳에 있다. 오랜 세월 한국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도 2016년에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와 함께 봉오동전투 현장을 처음으로 답사했다. 

이제야 언론에서 봉오동전투 승리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몇몇 신문보도와 인터뷰가 있었고 2018년 EBS <어느 3형제의 선택>, 2019년 KBS <봉오동전투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가 방송되었다. 느리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2021년은 봉오동전투 승전 101주년이다. 그동안 외면당했던 봉오동전투 승리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구체적 기획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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