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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뮈텔 주교의 일기로 본 민영환의 자결과 혈죽 미스테리

일제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빼앗자 충정공 민영환은 자결하였다. 그의 피가 묻은 옷을 보관하고 있던 마루에서 충절을 기리는 듯한 혈죽(血竹)이 돋아나서 큰 이슈가 되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민영환에게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내렸다.

오늘은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자결한 날이다. 민영환의 자결과 그 이후 피어난 혈죽에 관하여 서양의 합리적 사고 방식과 카톨릭 신부로서 뮈텔 주교가 일기를 작성한 것이 있다. 이 혈죽의 기적을 애써 외면하려는 면이 보이지만 현장감 있는 언어로 작성되어 신선한 감이 있다.

 뮈텔 주교의 일기 4권(1906년~1910년) 61~63p

7월 6일(1906년)

오늘 아침 신문들이 일제히 민영환의 집에서 일어난 이른바 기적을 보도했다. 피로 얼룩진 그의 옷가지며 그가 자결하는 데 사용한 단도를 넣어 둔 헛간에서 갑자기 뿌리도 없이 이상하게 대나무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보러 갔다. 종로에서 典洞 거리는 그의 집까지 오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 그곳으로 순례하려는 사람들의 무리였다. 집과 마당에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차 있었고 각기 다른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간 남녀 군중은 서로 다투어 그 기적을 보려 했다.

다행히도 나는 낯익은 그 집 식구 한 사람이 나를 알아봄으로써 그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채를 지나 거기서부터 팔꿈치로 길을 터주며 기적의 방까지 안내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는 군중들이 너무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나무를 가로 질러 못질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나만은 그 횡목(橫木) 밑으로 해서 대나무를 만져 볼 수 있을 만큼 대나무 앞까지 나를 인도해 주었다.

과연 첫인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장판지로 바른 마루 틈 사이로 죽순들이 솟아 나와 있었다. 4개의 순에서 9개의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또 그것들이 나 있는 넓이가 30cm 정도였다. 첫 번째 순은 길이가 60내지 70cm나 되었으므로 지탱이 어려워 근처에 있는 의자에 기대 놓았고, 나머지 순들은 그렇게 길지 않아 지탱이 되고 있었다. 그 마루를 바른 장판지는-마루는 후에 놓았고 또 방바닥은 다른 온동방들처럼 돌과 흙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군데군데, 특히 마루의 연결 점에서 해져 있었다. 죽순이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 다른 곳보다 더 파손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누가 일부러 그 죽순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한 흔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것이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서 자라 나 온 것이라면, 장판지가 찢어졌거나 꿰뚫고 나와 자란 흔적이 조금은 있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모든 흔적을 교묘하게 없애 버린것 같다.

나는 내 안내자에게, 만일 방안의 어두운 곳에서 자란 대나무라면 잎들이 하얗고 싹이 좀더 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조금도 그렇지 않았고, 잎들의 푸르름도 아주 짙은 색은 아니었을지라도 어두운 그늘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내자는 3일 전에 기적이 일어났을 때는 잎들이 과연 거의 흰 색에 가까운 노란 색이었는데, 그 후로 햇빛을 받게 되어 녹색이 되었다고 재빠른 대답을 했다.

신문은 9개의 줄기에서 33개의 잎이 나 있다고 보도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잎이 45개라고 말했는데. 그 숨은 이유인 즉 영웅(민영환)이 45세에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직접 그 잎들을 세어 보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뿐더러 이제 겨우 싹튼 잎들까지 계산되어질 수 있으므로 그와 같은 계산은 흔히 융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군중은 특히 호기심에서였고. 그래서 신문에서 언급한 감동이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적으로 믿으려 하지만 어떤 속임수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루 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전혀 모르며 바로 그것이 기적이라고들 대답했다. 나도 그랬으면 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방 주위를 둘러보고, 특히 마루 밑에 통로가 있는의 여부를 살펴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나왔다.

2시경에 이번에는 비에모 신부가 구경하러 갔다. 구경꾼들이 좀 줄어서 그는 모든 것을 여유 있게 살펴볼 수 있었다.

뮈텔주교의일기 : 1880년 10월 입국하여 1890년 8월에 제 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사망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거의 매일 쓴 일기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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