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국 :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임나 10국 :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湌國, 염례국 稔禮國
“탁순에 집결,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비자발(比自?)·남가라(南加羅)·녹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 주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이다.
임나 10국의 구체적 명칭은 <일본서기> 흠명천황 23년조에 기술돼 있다.
* 23년 春正月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一書에 21년(561)에 임나가 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飡國) 염례국(稔禮國)으로 합해서 10국이다). (<일본서기> 긴메이 23년(562) 정월 조)
태백일사와 일본서기 흠명천황 23년 조에서 동시에 임나를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맹체로 규정하였는데, 연맹체와 10개의 나라라는 2가지 항목의 일치는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렵다.
태백일사와 일본서기가 임나를 기록한 책을 공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임나의 위치가 중요한데 한반도에서는 10개의 가야가 속한 임나 연정이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임나가 일본 열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임나 10국의 위치에 대해 바다에 섬으로 있는 삼국은 가라국(대마도), 사이기국(일기도), 자타국(오도열도)이라 하고, 육지에 있는 7국은 안라국(아소산 남쪽), 다라국(<환단고기>에 ”다라국이 안라국과 이웃하고 同姓이며 과거에 熊襲城이 있었는데 지금은 九州 熊本城이 이곳이다.“ 라고 하여 논자는 웅본(구마모토)로 본다), 졸마국(延岡 : 노베오카), 고차국(坊澤 : ), 산반하국(別府 : 벳푸), 걸랑국(久留米 :구루메), 염례국(宮崎 : 미야자키) 이라고 하였다.
1) 구주에 있는 다라 지명들
그런데 '다라'라는 지명은 現 일본 사하현에 집중되어 있다. 검색되어서 나오는 것만 나열해보면 多良岳(다라악),大字多良(대자다라,太良町(다라조) 등이 있다.
☞多良岳(다라악) : 일본 사가현 후지쓰 군 다라조 다라多良
☞大字多良(대자다라) : 일본 사가현 후지쓰 군 다라조
☞太良町(다라조) : 일본 사가현 후지쓰 군
후지쓰(藤津) 郡의 아리아케우미 서안에 위치한 이 지역 일대에는 太良(tara),多良(tara), 田原( tahara) 들이 나오고, 多良中山과 多良山(일명 多良岳)이 남쪽을 가로막고 섰다. 다라多羅,多良(tara)는 다라촌(多良村)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다라산(多良山(岳)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300편 넘는 논문을 써서 임나일본부가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논증한 최재석 교수는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多良村(다라 마을),多良山(다라산) 일대에 비정했다.
인하대 남창희 교수는 일본 규슈의 아리아케해 우측에는 다라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같은 지명을 太良, 多良 등 여러 가지로 음차한 흔적은 원 지명이 다라악 (다라산) 한국 지명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이 다라산에 대해서 "츠쿠시풍토기"에는 [藤津多良峰]으로 기록된 점으로 옛부터 "다라'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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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의 구주 이동과 다파라국 (다라국) 건국
다라에 대해서는 『환단고기』에 명확한 위치가 나온다. 그 위치는 위 지명과 일치한다. 이 기록을 살펴보자.
고구려 개국시 주몽이 함게 했던 오이,마리,협보가 있었다. 그중에 개국공신 협보가 있다. 협보는 2대 유리왕 시절 갈등으로 인해서 일본 열도로 넘어가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협보가 유리왕에게 "정사를 소홀히 하니 바로잡으소서"라고 간하자 유리왕이 대노하여 협보를 대보에서 파하고 관원(官園)의 일을 보게 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토사구팽에 실망한 협보는 그대로 고구려를 떠나서 남쪽의 한(南韓)으로 가버렸다고 전한다.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왕이 이를 듣고 매우 화가 나 협보의 관직을 파하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가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2년(3)〕 12월에 왕이 질산(質山)註 001 북쪽[陰]에서 사냥하며 5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평안히 지내지 못하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형정(刑政)을 올바르게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말을 달려 사냥하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왕께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신다면, 신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매우 화가 나 협보의 관직을 파하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가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이종휘 동사 협부을송열전
....협보는 동명ㆍ유리(琉璃) 부자의 시대 40여 년을 섬겨 벼슬이 대보(大輔))에 이르렀다. 유리왕 22년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겨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새로운 도읍은 북쪽으로 패수가 굽어진 데에 있어서 산수가 깊고 견고하여 순록[麋鹿]을 쏘아 맞추는 즐거움이 있었다. 왕이 또 무사안일에 빠져 일찍이 질산(質山)에서 짐승을 사냥하느라 날이 가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협보가 간언하였다.
“지금 나라의 도읍을 새로 옮겨서 백성들은 어진 정치[德政]를 하여 편히 살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대왕께서는 나라의 일[軍國之務]은 버려두고 꿩이나 토끼를 쫓아다니기를 즐기느라 5일이나 성을 떠나 궁을 비워두고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래도록 고치지 않아 백성들의 마음이 한번 흩어지면 선왕의 공업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왕이 노하여 협보를 파직시켰다. 이때 왕은 자못 죽이기를 좋아하고 이로운 것에 뜻을 두어 곧 비루해져서 작은 죄라도 파묻어 죽이니, 대신들이 많이 두려워하였다. 협보가 마침내 남쪽 한으로 달아났다. 오이ㆍ마려는 함께 유리왕의 장수가 되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멸망시켰다. 협보가 후에 죽게 된 사정은 알지 못한다.
이후의 협보의 행보는 남쪽의 한으로 달아났다는 것 외에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기록이 없다. 이종휘의 『동사』「협부을송열전」에도 남쪽 한으로 달아났고 그 후에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정확하게 그 행보가 기록되어있다. .해포를 거쳐 항해하여 구야한국에 다다라서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 일대로 옮겨 살게 되어 여기에서 다파라국의 시조가 된다. 다파라국은 삼국사기의 다파나국과 동일한 나라다.
협보가 .... 해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의 시조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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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보의 나라는 『태백일사』에는 다파라국多婆羅國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하는데 같은 나라다. 결국 다파라국이다. 『태백일사』에는 다파라(多婆羅)를 일명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다파라多婆羅는 다라多羅라는 뜻이다. 이 다라 지명이 큐슈 지역에 많은 이유는 거기에 다라국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이 다라국은 구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라국만 잘 연구해도 일본서기의 문제시되고 있는 신공 49년조의 7국 위치와 임나 10국 위치가 풀릴 것이다. 가야를 한반도 남부에만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역사왜곡이다. '임나'는 대마도를 포함한 큐슈 지역이라는 민족사학의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는 이러한 합리적 이성과 추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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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3일 규슈 구마모토에서 플랭카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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