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는 가야가 아니다"
지난 2017년 9월 28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가야문화 복원을 통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36회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인 황순종 박사의 발표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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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순종 박사 |
임나가 가야와는 판이한 나라라는 증거는 오히려 너무 많아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여기서는 그 중 몇 가지만 간략히 논하겠다.
첫째, 임나의 위치에 대해 『일본서기』 스진(崇神) 조에는 “북쪽으로 바다에 막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계림은 신라의 옛 이름이므로 그 서남쪽에 있으며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은 대마도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한반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를 비롯한 식민사학에서는 임나가 ‘북쪽으로 바다에 막혔다’는 부분은 모른 척하고, ‘계림의 서남쪽’이라는 구절만 가지고 임나를 한반도 신라의 서남쪽에 있던 가야와 동일시하고 있으니 이는 사료를 허위로 해석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에서는 스에마쓰의 임나에 관한 위치 비정을 그대로 추종하여 임나가 가야라 하며, 그 영역이 경상도 일대만이 아니라 전라도 전역에 이르렀다는 설을 견지하고 있다.
둘째,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와는 다른 실체라는 것은 『삼국사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임나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스에마쓰의 주장대로 임나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친 대국이었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야 마땅한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다만 「신라본기」에 임나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야는 서기 77년부터 등장하여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562년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이사부와 사다함에게 진압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기까지 모두 15건의 기록이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라와 임나와의 관계에 대해 529년에 와서야 처음 기록되었으며 그후 646년까지 집중적으로 15건이 보인다. 『삼국사기』의 신라·가야 관계 기사와 『일본서기』의 신라·임나 관계 기사를 비교해 보면 동일한 기사가 단 하나도 없으며, 같은 해에 기록된 경우도 562년 1회를 빼고는 없다. 따라서 『3국사기』의 가야·신라는 『일본서기』의 임나·신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들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백제와 가야와의 관계를 보면 『3국사기』「백제본기」에는 임나는 물론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런데 김현구(전 고려대 교수)는 백제가 369년에 임나를 평정하고 2백 년 동안 경영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임나에 관한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임나의 강역이 전라도 전역에 이르렀다면 백제와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삼국사기』에서는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까?
학문은 결코 어렵고 난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에서 출발한다. 임나는 한반도에 없었고 가야 또한 경상도 지역에만 있었기에 백제와는 충돌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넷째,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가 아니라는 점은 세부적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명백해 진다. 가야와 임나는 각각에 속한 나라들의 숫자와 이름들이 모두 다를 뿐 아니라 두 나라의 건국시기, 멸망시기, 왕들의 이름, 각각의 국세나 주변국과의 관계 등 그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세부 사항으로 들어갈수록 가야와 임나는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논란이 불필요하다. 황국사관에 병든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이나 그 설을 변형해 신봉하고 있는 김현구의 백제에 의한 임나 지배설이나 학자적 양식과 정확한 논리로 접근하면 파탄으로 끝난다.
끝으로 임나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에마쓰의 임나에 대한 잘못된 위치 비정을 통해 알아보겠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에 속한 나라 이름이나 그에 속한 읍 등 20개가 넘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가라·안라·다라·탁순·사이기·졸마·고차·걸찬·임례 등 10여 개 나라 이름과 침미다례·포미지·반고·상차리·하차리·사타·모루 등의 현읍 이름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이런 지명들의 위치를 비정하려면 먼저 일본열도에서 찾아보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만약 그 중 일부가 한반도에서 찾아질 경우 신중한 방법으로 인정 여부를 논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이웃 나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손발과 입을 꽁꽁 묶어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우기던 호시절이 그리워, 패전 후에도 다시 우리를 점령하려는 야욕에 눈먼 스에마쓰같은 침략주의자의 안중에 그런 합리적 자세가 있을 리 없다. 스에마쓰는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전제 아래 그 숱한 지명들을 무조건 한반도에서 찾으려고 『삼국사기』「지리지」를 이 잡듯이 구석구석 뒤졌지만 단 하나도 같은 지명을 찾지 못했다.
오사카를 한반도에서 찾으니 찾아질 리가 있겠는가?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적인 학자였다면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에마쓰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한반도에서 찾는 것은 포기하고, 대신 발음이 하나 쯤 유사한 지명을 한반도에서 찾아 그곳이 『일본서기』에서 말한 임나의 지명들이라고 억지 비정을 한 것이다.
설사 똑같은 지명이 나왔더라도 그것이 『일본서기』에서 말한 곳인지 여부를 다른 사료와 비교하면서 교차검증해야 정상이지만, 미리 전제를 세워놓고 찾는 것이니 교차검증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문헌고증’이 허울 뿐인 허위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스에마쓰는 ‘탁순’이나 ‘탁국’이 모두 『삼국사기』의 ‘달구화’(지금의 경북 대구)에 해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둘 다 대구로 할 수 없으니까, ‘탁순’은 대구 지역으로 보내는 대신 ‘탁국’은 그 남쪽 3리에 있었다는 ‘압독’군(지금의 경북 경산)으로 보냈다. 참으로 편리한 방법이다.
그러나 비록 발음이라고 해도 ‘탁국’과 ‘압독’이 유사성이 인정되겠는가? 그리고 탁국을 대구 남쪽 3리의 경산으로 비정하려면 『일본서기』에 탁순 남쪽 3리에 탁국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 스에마쓰의 비정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러한 기록은 없다.
<이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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