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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눌의 『깜박 잊은 우리말, 우리역사』 훈민정음 해례(解例)
훈민정음 해례

정인지가 해례본 서문에 밝힌 내용이다. “28자의 훈민정음은 상형(象形)으로, 그 자형은 고전을 본떴다(象形而字倣古篆).”고 했다. 

1446년이다. 그가 고전(古篆)이라 증언한 확신감은 어디서 왔을까?

1487년(성종 18. 2월 2일) 실록 기록을 우선 살펴보자. “신숙주·성삼문 등이 요동에 왕래하기를 13번이나 하였다” 년 2회 왕복이면 7년, 년 1회면 13년을 왕복한 셈이다. 

그 오랜 시간 신숙주 일행은 명나라 유배자 황찬(黃瓚)을 매개로 고조선 영역을 순방하며 비밀한 방법으로 가림토(加臨土) 문자와 관련된 방언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음운(音韻)에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지난(至難)했던 문자 전쟁이 내밀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실록에는 요동 파견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明의 속국이라는 특수 관계에서 자칫 역모의 실마리가 제공될까 하여 실록 및 여타 기록에도 비밀을 유지한 것은 아닐까?

신숙주 일행이 수집했을 방대한 자료가 그 토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옛 전자(古篆)는 BC 2181년에 만든 38자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일컬었음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기록도 보인다.

“신시(神市)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紫府)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蚩尤)에 화서(花書)가 있었다.”

세종은 세계 최초의 문자를 증빙하고자 위험을 감수하고 신숙주 일행을 13차례나 파견한 것이 아닌가?

한문수/ 역사칼럼니스트 수필가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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