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변강쇠 캐릭터

 변강쇠는 조선후기의 쇠잔하고 척박한 시대가 낳은 캐릭터다. 제도권에서 밀려나 유리걸식하던 발칙한 인물이다. 흔히 강쇠라면 천하의 난봉꾼을 연상케 하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다.

 판소리 변강쇠의 이본(異本)이 ‘가루지기타령’으로 유랑민들의 애환과 강쇠의 이미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가루지기란 송장을 장작처럼 지고 가서 묻는다는 뜻이다. 조선후기 유랑민들의 피폐해진 삶은 끝없이 밟혀도 일어서는 풀잎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천민들의 죽음도 화려한 장례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변강쇠와 한통속인 옹녀도 문명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다. 여섯 명의 서방을 죽게 했다는 청상(靑孀)살이 문제가 되어 월경촌에서 쫓겨난다. 사설은 그렇지만 옹녀 스스로 봇짐 싸들고 탈출했다는 편이 옳다. 제도권이 얽매고 있는 수절과부에 대한 사회적 올가미를 과감히 거부한 저항적인 기질과 반골적인 캐릭터는 변강쇠를 빼닮았으니 천생연분인 셈이다.

 청석관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화상은 마음을 돌려먹고 지리산자락 함양 땅에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허튼 짓 이외는 아무 재간이 없는 강쇠가 문제였다. 나무 해오라는 옹녀의 등쌀에 동구 밖 장승들을 모조리 뽑아다가 패어 때고 뜨끈뜨끈한 구둘목에서 한껏 놀아났다.

 원통한 함양 목신들이 노량진 두목장승을 찾아가 읍소했고 대노한 두목은 팔도에 사발통문을 돌려 변강쇠를 단죄한다.
 
 당장 목을 잘라 죽여서는 한이 차지 않으니 조선 땅에 있는 94가지 병이라는 병은 모두 강쇠에게 한꺼번에 앓게 하는 이른바 ‘병’도배를 당해 옴짝달싹 못하고 뻣뻣하게 선채로 죽는 장승죽음을 맞는다.

 장승은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고 민족정체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강쇠의 장승 패 때기는 반사회적이고 변형된 체제도전이다.
 
 결국 변강쇠타령은 음담패설로 일관한 사랑 놀음이 아니다. 작품의 사설 속에 녹아있는 알레고리는 기존질서에 대한 반체제적 에너지의 표출이다. 강쇠가 아무리 체제도전의 저항을 계속한다 해도 매번 바위에 계란치기다. 무모한 현실도전에 대한 심리적 갈등만 증폭시켰다.

 따라서 변강쇠의 사회관은 ‘무정부’주의다. 체제에 대한 좌절감과 갈등심리로 죽어서도 칼날 같은 반항심만 남아 있다.

 변강쇠타령의 작품성도 역설적인 플롯에 있다. 유랑민의 고초를 희극으로 각색하고 우리고전에서 유례없는 비극적 종말로 처리했다. 여왕벌인 옹녀도 허공으로 증발되고 만다. 곧 존재의 무화(無化)다.
 
 강쇠는 기댈만한 언덕도 없었고 유리걸식하는 떠돌이로 태어났으니 잃을 것도 없는 철저한 민초였다. 문제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데 있다. 이로 인해 본인의 삶이 파멸되지만 그의 저항적인 의식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강쇠적인 기질은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다.
 
 뻣뻣하게 서서 죽는 장승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후회하지 않고 절대자에게 참회하는 장면이 없다. 그들에게 신은 사치스런 존재이다.

 그의 치상과정에서 7명의 다른 떠돌이들의 죽음조차도 희극적으로 처리하며 공포나 연민의 정이 없다. 가객은 부채를 짝 펼치며 숨이 딸칵, 악사는 가얏고를 켜다가 그만 식고, 퉁소장이는 힘이 빠져 그만 자진하는 등 괴기한 죽음의 연출도 해학적으로 치부하는 눈물겨운 소극(笑劇)성이 체제저항의 변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쇠와 옹녀는 역설적으로 ‘한’문화의 왜곡을 고발하고 있다. 상하가 하나라는 생각이나 자타여일(自他如一)의 민족원형들이 철저히 봉쇄된 신분체제에 대한 아나키즘이다. 누구에게나 변강쇠 캐릭터는 숨어 있는 것이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