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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종의 『가야사(伽倻史)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5)

" 임나일본부의 실체 2 "

 

지난 2017년 9월 28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가야문화 복원을 통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36회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인 황순종 박사의 발표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황순종 박사

 

 

 

 

 
 

 

 

 

한편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왜에서는 임나에 수시로 사인, 즉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오후미노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근강모야신), 모노노베노이세노무라지치치네(物部伊勢連父根:물부이세연부근), 사네히코(狹手彦:협수언), 츠모리노무라지(津守連:진수련) 등이다.

 이 사신들의 구체적인 행위를 살펴보면 『일본서기』의 허구성이 금방 드러난다. 우선 오후미노케나노오미(근강모야신)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게이타이(繼體) 21년(527) 6월 조에는 오후미노케나노오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오후미노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는 6만 군중을 이끌고 신라에 의해 격파된 남가라(南加羅)·탁기탄(喙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기 위해 임나에 가려고 했다. 이에 축자국(筑紫國:쓰쿠시)의 국조(國造) 반정(磐井:이하위)이 반역을 도모해 ·····”

  이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게이타이 21년, 즉 서기 527년이라는 해이다. 그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남가라를 김해의 금관가야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서기 527년에 이미 남가라 등이 신라에 격파되어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후미노케나노오미(모야신) 등이 신라에 격파된 남가라·탁기탄을 재건해서 다시 임나에 합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한 것은 이때부터 5년 뒤인 532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삼국사기』가 틀렸다면 일본인 학자들은 금관가야는 이미 527년에 망했다는 근거를 대야한다. 『삼국사기』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가 충돌할 경우 『삼국사기』 기사가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역주 일본서기 2󰡕의 주석을 보면 여기의 ‘남가라를 김해의 가라국, 탁기탄을 가야 소국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해 가라국은 그 5년 후에야 신라에 항복하는데, 이미 신라에 망했다는 남가라를 김해의 가라국이라고 버젓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학을 추종한 결과이다.

  또한 남가라·탁기탄 재건을 위해 6만의 군중을 동원하려 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때까지 야마토에는 6만의 군중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쓰쿠시국의 반역으로 인해 가지 못했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불과 2년 후인 게이타이 23년(529) 4월 조에 다시 오후미노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가 등장하고 있다.

“이에 오후미노케나노오미를 웅천(熊川)에 보내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소환했다. 신리왕 좌리지(佐利遲)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보냈고, 백제는 은솔(恩率) 미등리(彌騰利)를 보내서 모야신의 처소에 모였고, 두 왕은 불참했다. 오후미노케나노오미는 크게 노해서 두 나라의 사신을 꾸짖어, ‘작은 것이 큰 것을 사대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왜 두 나라 국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칙명을 받지 않고, 가볍게 사자를 사신을 보냈는가? 지금 너의 왕이 칙명을 받으러 온다고 해도 내가 칙명을 전하지 않고 반드시 물리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지포례와 은솔 미등리는 마음 속에 공포가 생겨서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불렀다.”

  불과 2년 전에 신라에 망한 남가라와 탁기탄을 다시 세우려다가 실패한 오후미노케나노오미가 2년 후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와 백제의 임금을 소환했다는 이야기다. 두 나라 왕이 사신을 대신 보내자 직접 오지 않았다고 크게 꾸짖었다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3류 코미디 같은 기사이다. 신라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꾸짖을 정도라면 신라가 어찌 감히 남가라와 탁기탄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또 523년은 백제 무령대왕 재위 마지막 해이다. 무령대왕은 1970년에 공주에서 발견된 지석에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으로 기록되어 있는 임금이다. 이때는 신라 법흥대왕 때인데  법흥대왕은 가야 국왕이 사신이 보내서 혼인을 청하자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시집보냈다. 야마토의 일개 사신이 백제의 무령대왕과 신라의 법흥대왕을 직접 오라고 불렀다는 것이니 이처럼 허황된 역사서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이 기사는 신라왕을 좌리지(佐利遲)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신라 임금은 한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앞의 󰡔역주 일본서기 2󰡕는 “법흥왕의 이름인 원종(原宗), 혹은 당시 신라의 중신이었던 철부(哲夫)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는 주석을 달았다. 근거? 물론 있을 턱이 없다. 󰡔일본서기󰡕를 사실로 보고 󰡔삼국사기󰡕를 꿰어맞추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이 기사들은 둘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조작이라는 것이다. 만약 조작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일까? 여기에서 말하는 신라와 백제는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신라와 백제가 아닌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분국론이 나오는 것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말할 것이 없지만 김태식이나 김현구 등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이 남북한 학자들의 분국론을 비판하려면 사료에 근거해서 비판해야 한다. 야마토에서 온 사신이 백제·신라 국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꾸짖었다는 기사를 사실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백제·신라는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신라와 백제가 아니라 대마도로 보든지, 아니면 다른 일본 열도 내에 있던 분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 게이타이 24년(530) 조는 오후미노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에 대해서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임나에서 사신을 보내, 모야신(毛野臣), 즉 오후미노케나노오미가 임나에 머문 지 2년이 되었는데, 정사를 소홀히 한다고 야마토에 고발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일왕이 모야신을 불러 들였으나 모야신은 귀국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임나왕은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라와 백제에서는 군사를 보내 모야신을 공격했다. 백제는 노수구리를 포로로 잡고 신라군과 함께 성을 포위한 다음 “모야신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모야신이 성을 굳게 지키며 싸웠기 때문에 사로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백제 두 나라는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고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길에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포나모라(布那牟羅)・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아부라(阿夫羅)・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五城) 등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사에서 백제왕과 신라왕은 임나왕이 군사를 요청하면 즉각 군사를 보내주는 속국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앞의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역주 일본서기 2󰡕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가 쌓았다는 구례모라성에 대해서 장황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남부 비슬산 서남록, 경남 칠원, 경남 양산, 김해 창녕 사이의 낙동강 북안, 창녕·밀양 사이의 낙동강 동안, 함안 구성리 산성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 2󰡕, 295)”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전제 위에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 맘대로 위치비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근거는? 물론 없다. 아무 곳이나 가서 찍으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다섯 성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구지파다지성에 대해서 󰡔역주 일본서기 2󰡕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성산동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고 적으면서, “그러나 근강모야신이 도착한 곳이 웅천(熊川)이고 창원으로 비정되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에 들어가 농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김해와 창원 주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반박해놓았다.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구지파다지성의 위치에 대해 달성군 구지면으로 비정한 것을 반박하고 김해와 창원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구지파다지성을 달성군 구지면으로 비정한 것은 ‘구지’라는 지명 때문이다. 달성군 구지면이 언제 생겼는지는 따지지 않고, 비슷한 음이 하나라도 있으면 1천 5백년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비정하는 것이다.

 󰡔역주 일본서기 2󰡕는 근강모야신이 도착했다는 웅천에 대해서 “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동 일대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위치 비정이면 충청도 웅천에 비정 못할 이유도 없다. 근강모야신이 일개 사신 자격으로 백제·신라 두 왕을 직접 불렀다는 이야기나, 백제·신라 두 나라 군사가 임나왕의 요청으로 연합군을 조직해 근강모야신과 싸웠다는 이야기 자체가 허황된 이야기인데도, 이를 사실로 믿고 위치 비정을 하는 것이다.

 근거가 없다 보니까 구례모라성 하나에만 무려 6개의 위치비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지파다성을 김해와 창원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도 물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런 것이 한국 고대역사학계의 위치비정 수준이다.
  모야신은 백제·신라 두 나라의 공격에도 잘 버텨냈다. 그런데 󰡔일본서기󰡕 게이타이 24년 10월 조는 “모야신이 부름을 받아 대마(對馬)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왕의 부름을 거부하고 두 나라와 전쟁까지 치르면서 저항하던 모야신은 갑자기 부름에 임해 야마토로 가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최소한의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편찬자들의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도 󰡔일본서기󰡕의 내용을 일부만 발췌해서 논리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단히 장황한 󰡔일본서기󰡕 게이타이 조의 모야신에 대한 일련의 기사에서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대마도에서 죽었다는 사실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모야신이 원래부터 대마도에 있던 임나로 가서 역시 그곳에 있던 신라·백제의 분국과 관계한 것으로 보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가야=한반도 남부”라는 주장은 사료적 근거는 물론 아무런 논리적 타당성도 찾을 수 없는 허구의 공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임나=가야’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공통점은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를 인정하면 󰡔일본서기󰡕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즉 한반도 남부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자체를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비교하고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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