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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 추도문을 게재하여 그의 순국을 애도했다 |
1장. 천마산의 서막
1919년 봄, 대한의 하늘 아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평북 의주의 산야에서도 3·1운동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한밤중, 천마산(天摩山) 기슭의 은밀한 처소에 모인 젊은이들의 눈빛이 빛났다. 그들의 중심에는 최장군, 최지풍과 함께 천마산대를 조직한 강인한 사내, 최시홍이 있었다.
"독립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싸워야 한다. 우리가 먼저 칼을 들지 않으면 저들이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산의 깊은 밤공기를 가르는 결의가 맹세처럼 울려 퍼졌다.
2장. 피로 쓰인 저항
1920년 여름, 천마산에서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복군총영장 오동진과 연결된 천마산대는 이제 광복군 천마산 별영대로 편성되었다.
어느 날, 평북 구성군 사기면.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 이윽고 신시주재소를 향해 번뜩이는 칼날과 총구가 겨누어졌다.
"이제 우리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 때다."
격발음과 함성이 뒤섞였다. 주재소를 습격한 천마산대는 밀정을 처단하고 다시 의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배신자 최학정을 찾아냈고, 단칼에 처단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더 큰 전투를 예고하는 서막일 뿐이었다.
3장. 끊이지 않는 투쟁
8월, 최장군은 부하 30명을 이끌고 의주 옥상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를 기습했다.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신념이 그들을 지탱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최장군은 독립군 200여 명을 모아 무장했지만, 점점 조여오는 일제의 포위망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그는 만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광복군총영의 제4영장이 되었고, 오동진, 홍식, 최찬, 김창곤 등과 함께 무장항쟁을 이어갔다. 1923년 9월, 그의 부하 최오산이 평안북도 회천군에서 경찰 주재소를 불태웠다.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지만, 일제의 눈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
4장. 배신과 체포
어느 날, 봉천성 임강현. 최장군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오동진은 상해 임시정부에 알렸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과 교섭하여 그를 일본에 넘기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의주 경찰서의 김덕기가 나서 중국 당국을 속였다.
"최시홍은 독립군이 아닙니다. 그는 만주 개척사업에 공헌한 인물입니다. 석방을 요구합니다."
결국 최장군은 석방된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3년간 옥중에서 싸웠다. 그리고 1924년 11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기개를 잃지 않았다. 키가 훤칠하고 카이젤 수염을 휘날리며, 그는 외쳤다.
"조국의 독립은 우리 국민 모두의 희망이다!"
5장. 최후의 길
1925년 3월 11일, 평양형무소. 그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장군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는 차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국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나라의 피 흐르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교수대가 내려왔다. 천마산의 별이 저물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남아 독립을 향한 불씨가 되었다.
6장. 추도와 영광
1925년 3월 25일, '독립신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실었다.
"최장군이여, 이제 어디로 가셨는가? 원수는 도전하고, 시국은 다 망했는데 장군은 떠나셨다. 그러나 우리는 장군의 정신을 기억할 것이다. 조국이 독립되는 날, 향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리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그리고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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