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단학회장 최시흥 장군과 천마산대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1920년대 초까지 국내를 기점으로 한 무장투쟁단체 가운데에 천마산대는 가장 혁혁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단체로 평가되고 있다. (채근식 , 《무장독립운동비사》, 1949 pp.64 ~ 65)
천마산대(天馬山隊)! 천마산대는 1920년 3월경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로, 근거지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산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여졌다. 때로는 ‘천마별영(天摩別營)’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단체에는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들은 전국 각지의 의병에 합류하였고, 일부는 독립군이 되어 만주와 한반도로 흩어졌다. 이들 중 일부가 천마산대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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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마산대를 이끈 이가 바로 최시흥 장군(1889~1925.3)이다. 올해는 최 장군께서 순국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그러나 대부분 최시흥 장군도 천마산대도 알지 못한다. 이 글을 통해 최시흥 장군과 천마산대의 헌신과 희생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최시흥 장군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의주군 고령삭면 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후, 만주로 건너가 류하현 삼원보에서 동지들과 활동했다. 이후 하얼빈으로 이동해 노농병(勞農兵)에 가입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12월, 최 장군은 만주 관전현에서 오동진 장군이 이끄는 광복단(당시 광복군사령부)에 가입했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와 천마산에서 천마산대를 조직하게 된다.
천마산대의 사령관은 최시흥 장군이었으며, 주요 인물로는 부관 최지풍(崔志豊), 참모 박응백(朴應伯)·박영찬(朴泳燦)·최윤희(崔允熙), 경리 김세진(金世鎭), 중대장 최의집(崔義輯), 소대장 김상옥(金尙玉)·김용택(金龍澤) 등이 있었다.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치된 독립군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천마산대는 조직된후 바로 무장 항쟁에 들어갔다. 그들의 항일항쟁은 군자금 모금,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의 파괴, 일본 군경 및 친일분자의 처단, 일제와의 교전 등의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3월 12일, 천마산대는 선천군 대산면 사무소를 기습하여 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를 처단했고, 의주경찰서 형사 김명익의 집을 공격했다. 이어 3월 24일 평안북도청 소속 강구 수의(獸醫)를 사살하였으며, 4월 18일 자성군 치작고개에서 우편물을 탈취하는 등의 작전을 수행했다.
5월에도 천마산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7일에는 의주군 고관면 서하동에서 친일분자를 응징했고, 9일에는 철산군 여한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18일에는 창성군 신창면 세덕동에서 헌병 보조원을 사살하며 일제의 지배 구조를 흔들었다.
6월부터는 더욱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6월 4일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 순사주재소를 공격해 순사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부상시켰다. 6일에는 강계군 문옥면 사무소를 급습해 공금 700원을 탈취하고 문서를 소각했다. 8일에는 벽동군 송서면 사무소를 공격해 같은 액수의 공금을 확보하고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에도 천마산대는 끊임없이 작전을 전개했으며, 6월 16일에는 ‘천마산대 군제 약정’ 당시 130여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천마산대의 전체 규모는 최대 200명, 많게는 500명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반격에 나섰다. 3월부터 일본군과 경찰 100여 명이 천마산을 포위 공격했고, 6월과 7월에도 대대적인 총공격이 이어졌다. 결국 천마산 유격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군이 천마산대 본부를 공격 함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여 오동진 장군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했다. 1920년 8월 대한광복군사령부가 설립되자 선생은 광복군총영에 합류, 제4영장으로 임명됐고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3중대장을 맡았다.
1920년 8월 7일에는 천마산대 단원 김효준(金孝俊), 김봉한,한치봉 등이 함께 평북 창성군 청산면 용암동 거주 강세흥, 강문섭, 강병정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봉한에게 전달하여 만주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전달하게 하였다
최시흥 장군의 단학회 활동
1920년 8월 15일 2대 단학회장 계연수 선생이 만주 관전현 홍성납자에서 밀정 감영극 무리들에 의해 잡혀 피살당하자 이후 최시흥 장군은 3대 단학회장도 맡게 되었다. 그의 친동생인 최시찬은 단학회의 재정 보조의 역할을 맡았다. 최시흥이 단학회 3대 회장이고 동생 최시찬이 단학회 일을 보았다는 것은 당시 천마산대 단원이었던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증언이다. 오 지사는 천마산대 단원 66명의 활동을 증언했다. 최시흥이 3대 단학회장이라는 이 귀중한 증언은 2대 단학회장과 1대 단학회장이 있었음에 대한 증언으로 환단고기 초간본을 편찬한 계연수 선생의 실존에 대한 입증 자료이며 그 단체인 단학회에 대한 증명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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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록(吳鳳碌, 1902∼1981) 지사는 1977년 4월에 천마산대 대원의 이름과 활동을 기록하여 『삭주군지』에 실었다. 총 66명의 명단에 마지막으로 이유암(李裕岩 *李裕笠의 誤記)을 소개하면서 “삭주군 출신. 나이가 어려 천마산대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다”고 썼다.’ *朔州郡民會, 『朔州郡誌』, 1991, 66∼68쪽. 이유립 선생은 단학회의 6대 회장이 되며 해방이후 계연수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대학자가 된다.
이처럼 최시흥 장군은 천마산대의 활동과 더불어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지키고 밝히는 단학회 활동을 병행해나간 것이다.
천마산대는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민사(義民社)·벽파대(碧波隊)·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그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통의부에 편입되어서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일제는 최시흥을 잡는데 현상금 5천원(약 2억)을 걸었다. 일경의 포위가 좁혀지자 선생은 1922년 대원들을 안전하게 만주로 이동시키고 뒤이어 만주로 가던 도중 중국 관헌에 체포됐다. 최시흥이 체포되고, 1923년 말 유격대원들이 대거 체포됨에 따라 국내 활동은 거의 종식되고 말았다.
최시흥은 장춘 일본 영사관을 거쳐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송되자 갖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준엄하게 꾸짖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1924년 7월 하순,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구형했고 1925년 3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시흥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렇듯 최시흥 장군과 천마산대는 국내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최시흥 장군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 뜻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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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대원들 |
독립신문의 최시흥 장군 추도문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 추도문을 게재하여 그의 순국을 대도했다. 그 추도문을 읽기 쉽게 현대의 글로 풀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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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장군을 추모하며〉
최 장군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뒤로하고 멀고도 먼 길을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아, 장군이시여! 한 많고 원통한 그 길을 떠나시면서 장군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뜨거운 피는 얼마나 요동쳤겠습니까? 아, 장군을 떠나보내며 우리들의 눈에는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립니다. 이것이 시대의 비극입니까, 아니면 하늘의 시샘입니까? 혁명의 용사였던 최 장군은 이제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나라가 무너지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해 도전하고 있는 지금, 장군은 이미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장군이여, 지난 5~6년간 폭풍 같은 세월 속에서 겪으셨던 처절한 전투와 고된 싸움은 이제 무엇으로 기념할 수 있을까요? 장군의 호령은 원수들을 떨게 만들었고, 장군의 용맹은 적군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장군의 칼과 총은 수많은 적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은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장군은 피 묻은 칼을 씻지도 못했고, 적에게 쏠 총알을 장전한 채로 떠나셨습니다. 일본 천황의 진영에 닿아 그들을 물리치고, 동경(도쿄)의 함락 소식을 듣기까지, 조국 독립의 승리의 외침을 보기도 전에 말입니다. 장군은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한 채 먼 길로 떠나셨습니다.
천마산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주린 배를 견뎌내신 날들은 얼마나 길었으며, 압록강가에서 배 한 척 없이 떠돌며 헤매신 횟수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전투에서 동지들이 적의 목을 베는 모습을 보고 웃으셨을 때도 있었겠고, 적의 총알에 동지들이 쓰러질 때 가슴 깊이 슬퍼하셨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장군이 이루고자 하셨던 큰 뜻은 중도에서 가로막혔습니다. 조국의 병사들조차 때때로 어긋난 행동으로 장군의 길을 막았고, 원수들의 독 같은 악행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40년 평생, 하늘에 닿을 정도로 깊은 원한을 가슴에 품으신 채, 형무소에서 순국하신 소식은 무엇 때문입니까? 장군이라는 큰 별이 사라진 이 소식은 얼마나 가슴 아픈 비보입니까?
장군의 육신은 이제 기성(의주) 땅 한 귀퉁이에 묻히시겠지만, 장군의 영혼은 여전히 패수(압록강) 강 위를 떠돌며 조국의 하늘과 땅을 지켜보실 것입니다. 아, 이 모든 것은 씩씩했던 영웅의 불운입니까? 아니면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까?
장군이여, 인간의 삶은 비록 끝이 있고, 영혼과 육체는 이제 분리되어버렸지만, 장군의 영혼은 우리 한민족의 영혼이며, 우리의 육신은 장군이 피로 물들인 조국의 산과 강을 잇는 혈육입니다. 부디 장군의 영혼이 조국의 땅과 강산을 떠나지 마시고, 살아 있는 동지들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의 강산에서 왜적이 모두 사라지고 조국이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날, 우리는 장군을 위해 향 한 자루를 밝히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 당신의 동지들이 올립니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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