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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화 타임즈 AI 이미지] |
오늘날 한국 사회는 갈등의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 교육, 노동, 젠더, 외교, 심지어 한류 콘텐츠에 대한 취향마저도 ‘좌우’라는 틀 속에서 해석되고 대립합니다. 다름이 곧 적대가 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배척의 대상이 되며, 논쟁은 곧 증오와 분열의 양상으로 번집니다. 질문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싸우는 걸까요?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공회에서 출발했습니다. 왕정 유지를 주장하는 세력은 우측에, 급진 개혁을 요구하던 세력은 좌측에 앉았습니다. 이후 이 좌우 구도는 정치적 사고방식의 대립 축으로 고착되었고,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 파시즘과 자유주의가 격돌하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고, 냉전시기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극단적으로 대립했습니다.
한반도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격동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과 분단, 6·25 전쟁, 이념 숙청, 냉전 반공 체제, 민주화 운동과 군사 독재의 교차, 그리고 문민정부와 정권 교체를 거치며, 좌우의 대립은 단지 이념을 넘어 생존과 명예, 가족의 역사와 정체성에 얽힌 절실한 문제로 각인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은 지금도 지역, 세대, 계층 간 정서적 분열의 주요한 뿌리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갈등은 단지 정치적 이념의 충돌로 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감정적입니다. 좌우라는 대립 구도가 일상의 언어와 사고방식까지 침투하면서, ‘정치적 입장’은 더 이상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곧 상대를 틀렸다고 넘어서, ‘위험하다’, ‘악하다’는 식으로 판단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화된 정치적 갈등은 온라인 공간에서 특히 강화됩니다. SNS는 개인의 성향에 맞는 정보만을 노출시키고, 사람들은 점점 자신과 유사한 생각만 접하게 됩니다. 반대 의견은 차단되고, 타인의 현실은 삭제됩니다. 우리는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진실은 파편화되고, 공통의 언어는 사라지며, 대화는 논박으로, 논박은 곧 적개심으로 번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좌우는 원래 다름의 표현이었지, 증오의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좌파는 평등과 약자의 권리를, 우파는 질서와 자유를 중시합니다. 각기 다른 사회철학과 인간관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 두 시각은, 사실 어느 하나가 완전히 틀렸다거나 모두 옳다고 할 수 없는 복잡한 지평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수많은 갈등과 시련을 거치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온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성장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공동체의 성숙은 더 이상 나와 다른 사람을 이기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정치는 타인을 설득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설득이 아니라 침묵시키려 하고, 함께 사는 법이 아니라 나만 옳다는 식의 배제의 정치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를 지치게 하고, 결국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좌우를 넘어서 사람을 보고,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진영의 깃발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보는 눈. 그것이 한국 사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할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입니다.
최가온 기자 gaonr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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