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열단에 가입 활동한 보천교도들 "
일제강점기 의열단(義烈團)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작년(2016)에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밀정(密偵)’이란 영화가 있었다. 다소 각색은 있었지만, 실제 의열단의 인물들과 그 활동을 다룬 영화였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의 길림성에서 조직된 비밀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김원봉이 단장을 맡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급진주의 단체이다. 중국 본토와 만주지역에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가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대한 반발로 급진적이고 과격한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보천교는 이러한 의열단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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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姜逸)과 배치문(裵致文)이 그 주인공들이다. 강일은 본명이 강홍렬(姜弘烈 1895-1958)이고 호는 학암(鶴巖)이다. 3·1운동 때 영남지역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합천지역에 배포했고 합천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1923년 초에 상해에서 개최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했다. 이 국민대표회의에는 100 여명 정도가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보천교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보천교 진정원의 배홍길(裴洪吉)과 김종철(金鍾喆), 보천교 청년단 강일이었다(조선총독부, 1923. 2. 21). 다른 종교계에서는 천도교측 대표가 동일하게 3명 정도 보인다. 이런 대회에 보천교 직위를 걸고 타 종교와 동일하게 3명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보천교의 위상을 실감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많은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 2월에 박은식(朴殷植)ㆍ김창숙(金昌淑)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촉진선언문을 상해에서 발표했다. 이에 각지의 동포들이 호응하면서 활발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회의가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한 끝에 1923년 1월 3일에 개막되어 국내ㆍ상해ㆍ만주일대ㆍ북경ㆍ간도일대ㆍ노령ㆍ미주 등 독립운동의 터전인 각지에서 100여 개의 단체, 100여 명 이상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안창호(安昌浩)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1923년 2월 21일, 민족 대표들은 선서문과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동일치와 희생정신으로 공결(公決)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국민의 완전한 통일을 견고히 하자고 선서하였다. 철저한 독립정신의 결정체로 범 민족운동을 위한 한민족 최대의 조직적 회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나자, 강일은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참석했던 문시환(文時煥 1897-1973) 등과 함께 의열단에 입단하게 된다. 같은 해 6월 말, 의열단 총회에서는 군자금을 모집하여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을 실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문시환, 구여순(具汝淳), 김정현(金禎顯), 오세덕(吳世悳), 배치문(裵致文)과 함께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었다.
식민권력도 이 무렵부터 의열단원에 대한 정보보고와 검거를 강화해 나갔다. 1923년 초 국민대표회의를 둘러싼 의열단 관련내용을 살펴보자. 좀 길지만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일은 경성 경신(儆神)학교와 중앙학교에 2,3년씩 통학하면서 사상운동 단체들을 출입하고 있는 중, 대정 11년(1922) 7월 공산당원 고(故) 최팔용(崔八鏞)으로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것이므로 출석하면 어떠한가라고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보천교 청년회 대표로서 국민대표회의에 출석한 강일은 1923년 1월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참석한 뒤, 같은 해 7월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자네[君]는 보통 단원이 아니라 특히 간부로서 인선(人選)된 이상 단원을 모집하여 상해로 보내고, 또 조선 내에 지부를 두어 여기에 들어오는 자금 모집 등에 진력해야 한다’는 명(命)을 받고 승낙하였다.
조선에 들어올 때는 김원봉의 지시로 상해 혜령(惠靈)전문학교 재학증명서를 얻어 7월 21일 상해를 출범(出帆)하는 지쿠고마루(筑後丸)로 일본 북큐슈의 모지(門司)를 경유하여 7월 말에는 부산에 상륙하였다. 부산진 좌천동(佐川洞) 최천택(崔天鐸)과 만나 함께 동래읍내 허영조(許永祚)를 동래의원으로 방문하였다. 문시환(文時煥)을 불러 지내며 김원봉으로부터 받은 신임장과 권총, 부호에 대한 협박문,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의 사직권고문과 함께 의열단 선전문을 지참하였음을 알리고 자기와 함께 이를 사용해서 자금모집을 해야 한다고 김원봉의 명령을 전했다.
(오세덕의 진술에 의하면) 자금모집 방법에 대해 연구한 결과, 민간에서 강탈하면 수 천 엔 이상의 탈취는 불가능하며 단체 중 보천교에는 수 십만 엔의 현금이 있으며 차경석이 이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소재지 정읍 모촌(某村. 대흥리이다-역자)은 한 마을 전체가 보천교도인 바, 이를 강탈하려면 다수의 사람이 필요하고 더욱이 운반에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황모(黃某, 배치문裵致文?)라는 보천교에 신용이 두터운 자를 통하게 하면 내부의 정보를 얻어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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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종로경찰서가 보고한 의열단원 검거에 대한 문건 |
보천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던 강일은 만주지역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당시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이었다. 보천교 청년단의 강일은 바로 그 김원봉으로부터 직접 단원과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도 의열단의 보통 단원이 아닌 간부로. 국내로 들어올 때는 김원봉의 신임장과 더불어 권총과 선전문 등을 지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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