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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철의 『한국인의 근원을 찾아서』 6편- 제2의 애국가, 아리랑

"느리게 부르면 슬프고 빠르게 부르면 흥겨워지는 노래가 아리랑"

 

한국인의 노래라고 하면 아리랑이다. 국가에서 정한 노래가 애국가지만 한국인의 심성 속에 들어있는 가락과 감성은 아리랑에 기울어져 있다. 한국을 떠나 사는 한민족들도 애국가는 잊어도 아리랑은 잊지 못한다. 아리랑의 어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너무 의견이 분분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아리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아리수, 아리랑에서 아리가 공통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 아리랑의 '아리'는 '길다(長)'의 뜻을 지니고 랑은 '령(嶺)'의 변음으로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아리랑은 곧 긴 고개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커다란 강을 뜻한 말이다. 한강을 '아리수'라고 불렀다. 아리수라는 뜻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강'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두 번째 애국가다. 심정적으로 아리랑은 한민족과 함께하는 노래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국가는 잊었어도 아리랑은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감성과 정체성을 많이 담고 있는 노래다. 하지만 아리랑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언제부터 불렸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 당연하게 작사가와 작곡자를 알 수 없다. 없어서 더 신비한 노래가 아리랑이다. 그럼에도 현존하고 있고,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부른다. 발원지가 있을 터인데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다.

본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리랑의 근원보다도 아리랑이 어떻게 많은 노래로 분화되고 다양해졌느냐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다. 아리랑이라는 노래는 특이하게도 하나가 아니라 많다.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고, 다른 음으로 구성되었음에도 한결같이 후렴은 아리랑이다. 어느 것이 첫 노래인지도 모른다.

아리랑은 200에서 500여 가지라고 하기도 하고, 60여종에 3천6백여 수가 된다고도 한다. 분류방법의 차이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특별한 것은 하나의 노래가 이렇게 여러 종류의 아리랑으로 변하고, 다른 가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나의 노래가 한두 가지로 변형되어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 3천 가지가 넘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아리랑이 지역마다, 계층마다 다르게 만들어 다르게 불려왔다. 신기할 만큼 많고 다양하다. 느리게 부르면 슬프고 빠르게 부르면 흥겨워지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한국인은 호기심과 다른 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한국인, 한민족의 어떤 특성이 하나의 아리랑을 3천 개가 넘는 다른 아리랑으로 분화시키고, 변형시켜 새로운 노래로 만들어내게 하였을까.

다른 것을 수용하는 기질이 강하다.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넘나들기도 하는데 이것이 지역마다, 계층마다 새로운 아리랑을 만들어냈다. 애환이 다르니 다른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인의 특별함은 응용과 변형에 대한 관용이다

극단을 수용하는 기질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극단을 수용한다는 말은 양쪽 극단을 이해하게 되면 중간도 알게 되고, 결국 전체를 이해하게 된다. 전체를 이해하게 될 때 통찰력이 나오고 통찰력을 기반으로 해서 직관과 창조가 있다. 한국인은 창조력이 뛰어난 민족이다. 하나로 통일된 것보다 분화된 것들을 즐긴다. 새롭게 파생되고 분화시켜서 다양하게 만드는 것을 즐긴다.

예를 들면 막사발 같은 경우 만드는 사람마다 크기와 모양 그리고 유악의 많고 적음을 도공이 마음대로 달리한다. 한 사람이 만들어도 고정된 완벽한 틀을 주장하지 않고 새로운 변형적인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즐긴다. 막사발은 막 만들어서 막사발이고, 막 사용해서 막사발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신이 그대로 담긴 그릇이다.

한국인은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고 깊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특성은 응용과 변형에 대한 관용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움과 천연덕스러움으로 나타나며 극치의 아름다움은 단순함으로 귀결시키는 위대함에 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자신의 특성을 집어넣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아리랑도 마찬가지다. 극단과 극단을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한다. 그래서 극단과 극단사이에는 숱한 다른 생각과 행동이 가능해진다. 극단을 넘나드는 우리만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노래가 문화유산이고 특히 아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을 찾아보자. 지금 남아있는 악보로 최초는 문경새재를 소재로 한 아리랑이다. 조선말 고종의 외교 고문이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1896년 펴낸 영문 월간지 '조선유기'(더 코리안 리포지터리, The Korean Repository)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1896년 이전에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애창했다는 근거다. 생각보다 가까운 시대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인 것들이 의외로 많다. 세계최초로 악보를 만들어낸 나라가 우리나라다. 세계 최초 인쇄 악보는 세종악보다. 세종 시기에 만든 악보다. 서양의 최초 악보 인쇄본은 노래모음집 '오데카톤'으로 1501년에 인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악보는 세종실록 악보 142권 1쪽-6쪽까지에 적혀 있다.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나 1450년에 사망했으니 세계최초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약소국의 기간을 오래 살아와서다. 이제는 분명 깨어날 때다. 위대한 민족이다.

서양 음악이 위대하다면 우리의 음악도 위대하다. 서양의 음악이 심장박동에 맞추어진 음악이라면 우리의 시조와 정악正樂은 호흡에 맞추어져 있다. 일반적인 서양음악에 비하여 3배 정도 길다. 우리음악은 심장막동에 맞추어진 노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호흡에 박자를 맞춘 노래도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 길고 느리면서 여유와 한가가 노래 속에 들어있다. 심장박동음악이 경쾌하고 밝다면 호흡음악은 느리면서 여유롭고 깊은 맛이 난다.

한국적인 정서에는 늘 공간이 있다. 틈이 있다는 말이다. 빈틈이 없는 것을 답답해한다.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노래도 그렇다. 긴 호흡으로 호흡 하나가 한 음절이 된다. 그리고 누구나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해서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개인의 응용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한국적인 정서다.
 
본인이 누차 이야기하지만 기어이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국인이다. 시조도 느리지만 가곡과 정악이라는 것이 있다. 이들은 더욱 느리다. 유장하게 강물이 흐르듯 느리고 아득하다. 목으로 부르는 노래지만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 들리는 노래다.
 
대표적으로 밝은 아리랑이 경상도 아리랑인데 그 중에 밀양아리랑이 가장 밝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하는 가락이 도발적이면서도 경쾌하다. 봄날에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새잎이 피어오르는 발랄함을 가지고 있다.

반면 대표적으로 슬픈 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은 느리면서 뒤가 쳐진다. 그럼에도 슬픔 안에 웃음을 담았다. 우리음악은 눈물과 웃음을 따로 보지 않고 하나의 큰 품으로 안고 있다. 다른 얼굴을 가졌음에도 심장은 같은 우리 아리랑은 ‘한恨’에 무게를 두지만 ‘흥興’도 함께 숨겨놓고 있다. 다름을 새로운 세계로 인식하는 극단의 수용이 한국인의 정서다.

▲ 신광철 작가, <극단의 한국인 극단의 창조성>의 저자. 시인-작가며 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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