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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0)보천교와 의열단2

" 차경석, 그리고 의열단의 중요한 연결고리 "

 

앞서 말했듯이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았다.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개 악(惡)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개 악은 총독 및 총독부 고문·군 수뇌·타이완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 행실이 못된 악덕 인사)이었다(임종국 1991).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는 ‘칠가살(七可殺)’이라 하였다.

1924년 한성은행 폭파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의열단원들이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은행을 폭파하려다 미수로 끝난 사건이다. 이 때 의열단원 6명이 검거되었는데 여기에 배치문이 들어 있었다. 배치문(1890-1942)은 바로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했던 배홍길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의열단에 입단하게 된다. 한성은행 폭파 미수사건 이후, 배치문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성격을 띤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체인 무산(無産)청년회에 참여해 주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민족지인 호남평론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도 계속하였다.

배치문 지사의 묘소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필자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먼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 지위를 갖고 세 명이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이 차경석의 승인 없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밝히는 일은, 만약 잘못되면 보천교에 닥칠 위험이 모두 고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다. 역으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참석자들의 요청에 응해, 차경석이 적극 상해회의 참석을 지원한 것이라고.

더욱이 이렇게 상해에 참석했던 보천교 대표자 3인 중 2인이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투쟁을 전개해 나갔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나머지 1명 김종철도 어쩌면 이름을 바꿔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추적이 어렵다).

보천교와 독립운동의 관련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이것도 우연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보천교진정원의 소위 ‘불온문서’ 계획(비록 실패했고 식민권력은 조작된 것이라 결론짓고 있지만)과 당시 보천교의 고민의 흔적들, 그리고 김좌진 장군이 만주 독립단체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처음부터 차경석의 입장에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 30명 중 임경호(林敬鎬), 주익(朱翼) 등 4인이 보천교 간부였고(안후상 1998), 그리고 주익은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하고 있었다(方基中 1996).

마지막으로 의열단의 투쟁방향을 고려할 때, 만약 소문대로 차경석이 친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종교가였다면 상해회의에 보천교 대표가 참석하고, 그들이 의열단에 가입·활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교주인 차경석 자신이 의열단의 암살대상인 ‘칠가살(七可殺)’ 중 하나, 즉 ‘반민족적 토호’에 해당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권력의 시선을 벗어나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간결하게 해결된다. 강일 곧 강홍렬과 배치문 곧 배홍길은 의열단과 보천교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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