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네 번째 연재의 시간으로 가락중앙종친회가 시조로 모시는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 그리고 일본으로 전해진 신교와 생활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두 차례 가지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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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모습 |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이 가지는 의미와 일본에 끼친 영향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첫째부터 셋째까지를 살펴보고, 다음 호에서 넷째 의미를 이어가겠습니다.
첫째,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은 단순한 왕실 결혼을 넘어, 동방의 땅에서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이 아득한 예로부터 우주의 주재자 하나님 또는 천주님으로 인식하며 불러온 '(황천)상제(님)’께서 정해주신 부부의 인연이라는 것과 오랜 세월동안 부르며 숭앙해 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사건입니다. 즉, 두 분의 인연은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께서 정해주신 천명(天命)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두 분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먼저 “개벽 이후 이곳에는 나라의 이름도, 군신의 칭호도 없고 단지 아홉 간(干)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때 구지봉에서 아홉 간을 처음 만난 수로왕은 “황천께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기에 내려왔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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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 |
서기 48년, 신하들이 왕의 혼인을 권하자 수로왕은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이 천명이듯, 왕후를 맞는 일 또한 천명일 터이니 그리 염려치 말라.”
그 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집안이며 당시 중국의 보주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허황후가 수로왕을 찾아와 말합니다.
“지난 5월, 부왕과 왕후께서 꿈에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습니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린 신성한 임금이나 아직 배필이 없으니 너희 공주를 보내 짝지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부모님과 하직하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이 단순한 혼인이 아닌, 하늘이 맺어준 신성한 인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가야의 신교(神敎) 문화와 생활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점입니다.
규슈를 중심으로 고대 일본의 통일 왕국이 형성되던 시기, 가야의 문화가 대거 전해졌습니다. STB 상생방송의 『환단고기 북콘서트』 오사카 편·부경대 편에서도 가야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의 신교문화가 일본에 전수된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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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열도에 널리 있는 가야계 지명들 |
특히 김수로왕의 딸 묘견공주는 일본 고대 왕국인 야마이국을 세우고, 일곱 아들은 득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여기에 백제·신라·고구려인의 진출까지 더해져, 고대 일본 사회는 한민족의 선진 문물과 신교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문화 전반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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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시랑과 사무라이 |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주군을 모시는 자를 사무라이라고 합니다. 모실 侍를 적고 이를 ‘사무라이’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본래 한민족의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사람을 뜻하는 ‘삼시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민족 신교의 정신은 일본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섬나라 특유의 보존력을 통해 그 문화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 고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마갑(馬甲)과 말머리 가리개는 가야를 비롯한 삼국의 뛰어난 기마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로 평가됩니다. 일본 고대 문헌에는 왜(倭) 지역에 “소와 말이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러한 유물들이 외래 전래품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기마 장비의 기술적 수준과 금속 세공 양식 역시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권 문화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학계는 이들 유물이 단순한 교역품을 넘어 기마문화를 포함한 복합적 기술 이전의 흔적일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서도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일부 한국·일본 연구자들은 백제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건너가 학문과 함께 말 암수 두 마리와 조련법을 전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일본 열도에 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점을 백제와의 교류 과정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 기록은 일본 언론과 연구자들에 의해 반복 인용되며, 고대 일본의 목축·기마문화가 대륙과 한반도에 의존했음을 시사하는 사례로 소개돼 왔습니다.
한편, 가야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후손들이 일본 규슈 남단에 건너가 지역을 평정하고 세력을 형성했다는 전승은 일본의 지방 문헌·신사 전승·지명학에서 여러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가야계 도래인(渡來人)의 활동과 연결되며, 이들이 일본 지역의 농경기술·제철기술·해양활동·기마문화 전파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의 기마문화가 일본에 체계적으로 전승된 구체적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고고학 자료와 문헌의 간극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은 한민족 신교문화와 생활문화의 전수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인류문화의 원주인이며 천손민인 우리 한민족으로 하여금 다시 추수되어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나라 최초의 모계 성씨가 탄생했다는 점입니다.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열 아들 중 두 아들 석(錫)과 명(明)에게 ‘허(許)’씨 성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모계 성씨가 형성된 사례로, 허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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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황후의 릉에는 ‘보주태후허씨릉 가락국수로왕비’ 라고 새겨져 있다 |
김수로왕은 두 왕자를 진례면의 비옥한 땅으로 보내 성주로 삼았으며, 이후 허씨 가문은 번성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허씨(약 35만)와 허씨에서 분파된 인천 이씨(약 10만) 그리고 양산 이씨(약 5천)를 포함해 총 45만 명 규모의 큰 성씨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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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가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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