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우리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지만 가야가 지닌 최고最古 두 가지를 소개하며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 다루는 두 가지는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왜 가야사가 다시 주목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 토대를 쌓았다면, 충분히 우리의 큰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학계와 함께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항목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허황후의 성씨인 허씨 성을 이은 두 왕자에 관한 것입니다. 지역 자료에 따르면, 김해시에서 2004년 발간한 『진례면지』에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 중 한 왕자는 서기 102년에 진례성(進禮城)의 성주로 봉해졌습니다. 그는 왕궁과 태자단을 만들고, 진례토성을 쌓았으며, 서기 103년에는 토성마을 위 첨성산 상봉에 천문 관측을 위한 첨성대를 설치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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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례면지 |
『김해지리지』에는 이 첨성대가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하며, 그곳을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곳’이라는 의미로 비비당(단)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김해시는 3년여의 작업 끝에 약 800쪽 분량의 『진례면지』를 발간했습니다. 당시 최장윤 면지편찬위원장은 “진례와 관련한 사실적 기록물이 거의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면지를 편찬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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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례면지 : 1914년 사진 속 진례토성의 모습 |
만약 기록에 남아 있는 이 첨성대가 천문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경주 첨성대보다 약 530년 앞선 것으로, 가야국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 중심 사회에서 계절과 날씨를 관측하며 국가 경영과 농업 계획에 천문학을 적극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국내외 학계의 깊이 있는 연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가야를 통해 전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와 관련됩니다. 기존 삼국사 기록에 가려서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경남 하동의 칠불사에서는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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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칠불사에 모셔진 일곱부처의 모습 |
1세기경,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허황후와 함께 가야로 올 때, 그들의 외숙인 범승 장유보옥 화상을 따라 하동에 와 성불한 것을 기념해 김수로왕이 국력으로 사찰을 창건한 것이 칠불사입니다. 여기서 ‘화상’은 높은 도덕적 경지의 스님, 즉 주지 이상의 스님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국내 불교 전래의 가장 빠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야불교는 이보다 약 250년 이상 앞섭니다. 이어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신라 법흥왕(572년, 이차돈 순교)의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동국대 김영태 교수는 “가야불교가 신라의 불교 수용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가야국의 불교는 일본 규슈로 전파되어, 백제 성왕(538년) 때의 불교 전래보다 약 400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두 가지 사례 ‘첨성대 설치'와 '가야불교 전래’는 모두 학계의 체계적 연구와 국민적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가야사는 단순한 지역사가 아니라, 한반도와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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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가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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