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9월 28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가야문화 복원을 통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36회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인 황순종 박사의 발표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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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순종 박사 |
" 김현구의 백제에 의한 임나지배설 "
김현구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왜가 임나를 지배했다는 설을 부정하고, 대신 백제가 임나를 지배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런데 백제는 사실상 왜의 속국이나 식민지와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실제로는 왜가 임나를 지배했다는 더욱 극우파적인 주장을 대담하게 펴고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에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다고 보는데도, 김현구만은 정반대로 『일본서기』만 맹신하여 일본이 백제를 지배한 것으로 본다.
김현구의 백제에 의한 임나지배라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만약에 백제가 임나 즉 가야를 지배한 것이라면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역사이므로 우리의 역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있어야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 대해 단 한 건의 기록도 없다. 반면 『일본서기』에 임나가 계속 나오는 것은 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백제와 임나의 문제라면 일본 역사에 기록할 이유가 없다.
그 둘은 김현구는 『일본서기』의 많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허위로 해석했다. 『일본서기』만을 토대로 임나문제를 논하는 자체도 잘못이지만 그 내용들을 허위로 해석한다는 것은 양심적인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이제부터 김현구의 잘못된 설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겠다. 『일본서기』 진구 49년 3월 조를 보자.
“아라타와케(荒田別)·가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사사노궤(沙沙奴궤)[이 두 사람의 성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했다. 그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만약 이 기록을 사실로 본다면 정벌의 주체는 아라타와케·가가와케이며 목라근자·사사노궤는 지원군이다. 그러므로 백제왕 부자와 만났을 때도 아라타와케·가가와케 등이라고 하여 목라근자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야마토 왜에서 왜군을 보내 임나를 정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지원군으로 참여한 것도 백제왕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왜왕의 명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라근자를 백제 장군이라 주석한 것은 그의 출신을 말한 것으로 왜에 귀화한 인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김현구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목라근자가 백제 장군이라고 한 부분만 보고 그가 백제왕의 명을 받아 지원군으로 가담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자기의 추리일 뿐이다. 그는 또 다른 왜의 장군들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였으나 아라타와케의 경우 『일본서기』 오진(應神) 15년(404) 조에 모야군(毛野君) 집안의 시조라고 명기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 집안의 시조를 가공의 인물이라면 유독 목라근자만 실제의 인물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한다는 말인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료의 해석을 멋대로 하는 것은 학지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임나는 한반도에 없었고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가 주도하여 임나를 평정한 것도 아니지만, 백 보 양보하여 김현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백제가 임나(즉 가야)를 평정했다면 후일 신라가 실제로 가야를 평정하고 군현으로 편입시켰듯이 백제도 그렇게 하고 지방관들을 임명해 다스리면 된다. 복잡하게 ‘임나ㅇㅇ부’같은 이상한 조직을 두어 다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백제만큼 넓다는 임나를 어렵사리 평정해 놓고 그 경영을 평정한 장군에게 맡기고 또 그 아들 목만치(木滿致)와 목씨 일가에게 대대로 전하게 했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백제왕이 대등한 세력을 가진 임나왕을 따로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왜 백제에서 해야 하는가? 결과가 이렇다면 상식적으로 애초에 정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목라근자의 아들이라는 목만치에 대해 보면 오진(應神) 25년(414)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백제 직지왕이 죽었다. 이에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소환하였다.’고 한다.].”
백제 직지왕(『삼국사기』의 전지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그 해가 420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은 6년의 오차가 있다. 그리고 목만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위 기록은 한반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왜열도의 백제·신라와 임나에 관한 것으로 보겠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는 왜에 살던 백제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당연히 『삼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목만치에 대해 김현구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편 그 아들 목만치는 『삼국사기』 475년 기록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을 따라 공주로 남천하는 백제에 실재했던 인물로 확인된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48~49쪽)
목만치가 『3국사기』에 보이는 실제 인물이라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평소 『삼국사기』를 사료 취급도 하지 않는 김현구가 정 다급하면 『삼국사기』에 기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3국사기』에는 ‘목만치’는 없고 ‘목협만치(木協滿致)’라고 나온다. 그런데 위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목라근자가 신라정벌 때(369) 얻은 신라부인에게 낳은 목만치는 475년에 백세가 넘는 나이다. 이 때 목만치가 생존해 있었다 치더라도, 그가 문주왕(당시 개로왕의 태자)을 호위하여 도망하는 중책을 맡았던 목협만치로 볼 수 있을까?
또 위 『일본서기』에는 414년에 목만치를 왜로 소환했다는데 그 후 다시 백제에 가 장군 노릇을 했다는 기록은『삼국사기』와 『일본서기』그 어디에도 없다. 『일본서기』에 대왜(大倭) 목만치라고 기록했듯이 목만치는 백제에서 왜에 귀화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였다는 것이며, 그들과 관련된 백제·임나는 일본 열도의 작은 나라들이었다.
106세나 되는 목만치의 나이가 문제가 되므로 김현구는 또 한 번 『삼국사기』에 기대어 곤경을 벗어나려고 이렇게 주장한다.
“『일본서기』에서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라고 씌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369년부터 그 아들 목만치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475년 사이에 백제가 신라와 싸운 것은 403년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가 유일하다. 403년을 전후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백제기』의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신라 여자를 취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목라근자가 목만치를 얻은 것은 403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18~119쪽)
『일본서기』에 인용한 『백제기』에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신라 여인을 얻어 목만치를 낳았다고 함은, 문맥상으로 위에 본 진구 49년(369)의 신라 정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현구는 엉뚱하게 『삼국사기』의 403년 ‘신라 변경을 쳤다’는 기사를 들먹이며 이때 목라근자가 신라를 쳤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왜 하필 목라근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목만치의 출생을 늦추어 그의 나이를 475년에 70세 정도의 호위대장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 변경을 쳤다’는 이 짤막한 기사는 구체적인 정보를 거의 전해주지 않는 사소한 사건이다. 이를 목라근자가 했다고 믿게 하려면 다른 무슨 정황증거라도 대야 할 것이 아닌가? 필자가 추리한다면 목라근자가 백제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가 이 사소한 사건의 주역일 수는 없다. 그는 이전에 신라를 격파한 후 광대한 임나제국을 모두 평정한 백제의 으뜸가는 장수가 아닌가? 『일본서기』만 믿고 『삼국사기』는 잘 알지도 못한다는 김현구가 ‘왜’를 ‘백제’로 무리하게 바꾸려다 보니, 『삼국사기』를 가지고 이런 비논리적이며 비학자적인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백 보 또 양보해서 그가 70세의 백제의 호위대장이었다 하더라도 그 후 그가 도일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김현구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서기』와 『백제기』가 다 같이 그가 한반도에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전하고 있고, 『일본서기』가 그 아버지 목라근자를 ‘백제장’이라고 명기하면서도 그를 ‘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목만치가 도일하여 왜인이 되었음을 잘 말해준다.”(같은 책, 119~120쪽)
『일본서기』와 『백제기』에는 위에서 본 대로 414년에 그를 일본으로 소환했다고 했을 뿐, 김현구의 주장대로 475년 이후 그가 일본으로 왔다는 기록은 없다. 이렇게 사료에 없는 이야기까지 자기의 잘못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은 속임수와 같다. 또 목라근자를 ‘왜인’으로 인식한 것은 그가 이미 귀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아들 목만치도 당연히 왜인인 것이지, 목만치가 475년 이후에 도일하여 왜인이 된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김현구 자신의 주장대로 목만치가 ‘왜인’이 되었다면 목만치에 의한 임나지배는 왜에 의한 지배이지 백제에 의한 지배가 될 수 없다. 김현구의 백제에 의한 임나지배라는 것이 허설임이 스스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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