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재(剛齋) 신숙 선생(1885.12.29 ~ 1967.11.22.)은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호는 강재(剛齋)이며 10대 후반에 동학에 입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국민신보(國民新報) 기자활동을 6개월간 하였다.
천도교 이념으로 독립전쟁 복무한 한국독립군 참모장 신숙(申肅)은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친일행각을 펼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대구 대교구장을 지내는 등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였고 천도교 상해전교실을 설치하였으며 천도교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 |
1920년 9월 북경으로 가서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 대표로 참여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5개월 만에 창조파와 개조파의 극렬한 대립으로 결렬되고 만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 정부를 세웠으며 내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길림·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27년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하여 신창학교(申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1월 신민부(新民府)의 민정위원이 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신숙은 1930년 신민부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침략이 간도에까지 미치자 한·중 연합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여 한중토일연합군(韓中討日聯合軍)을 결성하여 대정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도로 가다가 영구(營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 석방되어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1945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해에 조직된 길림한국인회의에서 위원장에 당선되어 피난민 구제와 귀국의 알선 등 동포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귀국을 돕는 일을 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보국당(保國黨) 대표로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1963년 신숙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상하였다.
![]()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