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전 대표의 이번 라이브는 “환단고기 비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비판의 형식으로 논쟁을 봉쇄하는 정치적 언어가 무엇인지 교과서처럼 보여줬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환단고기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자체를 겨냥했다. “논쟁은 끝났다”는 선언으로 질문을 죄악시하고, “대통령은 말하면 안 된다”는 말로 발화권을 봉인하며, “환빠”라는 낙인으로 상대를 대화 밖으로 밀어낸다. 이것은 학술적 검토가 아니라, 프레임 전쟁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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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는 한동훈 |
그는 입을 열자마자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 자리에서 환단고기를 거론한 것은 큰 문제”라고 못 박고, 이어서 “미리 준비했으면 더 문제, 준비 안 했어도 더 문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어느 길로 가도 같은 결론에 도착하게 된다. 논증이 아니라 판결문 구조다. 이미 결론을 써놓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정서를 채워 넣는 방식이다. 대통령 발언의 적절성을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절차의 문제’를 ‘내용의 절멸’로 곧장 연결시키는 순간, 그는 비판자가 아니라 심판을 자처하는 권력이 된다.
그가 반복하는 “역사학계의 거의 만장일치”라는 말은 특히 위험하다. 학문에서 ‘만장일치’는 진리의 증명이 아니라, 대개 기득권의 관성을 뜻한다. 역사학의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사료비판, 서지학, 언어학, 고고학적 상관성 등 서로 다른 근거들의 경쟁과 검증이다. 그런데 그는 “만장일치”라는 단어를 방패처럼 들어 올리고, 구체적인 논증의 층위를 생략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권위 호소다. “학계가 그랬다”는 말로 청중을 설득하는 순간, 비판은 검증이 아니라 동원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지구 평평론” 비유다. 그는 환단고기 논쟁을 ‘평평론’에 비유하며 “대통령이 과기정통부에 왜 평평론 대응 안 하냐고 묻겠냐”고 말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 비유는 역사학을 모욕한다. 자연과학의 사실(지구의 형태)은 반복 가능한 관측과 측정으로 종결되지만, 역사 논쟁은 문헌의 성격·전승의 구조·편찬의 동기·시대어의 흔적 등 해석학과 문헌비평의 영역에서 다뤄진다. 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순간, 그는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역사학 자체를 과학 흉내로 격하시킨다. “실증”을 말하면서 실증의 결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이 라이브의 핵심 무기는 결국 근거가 아니라 낙인이다. “환빠”라는 표현을 꺼내고, 환단고기를 특정 종교 프레임에 가둔다. 이 방식은 논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논쟁 상대를 ‘연구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으로 바꾸는 순간, 청중은 내용 대신 감정으로 판단하게 된다. 더구나 “대통령이 환빠일 수도” 같은 말은 정책 비판도, 발언 분석도 아니다. 그냥 동기와 성향을 추정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정치적 공격이다.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공적 발언의 무게”는 정작 자기 입에서 가장 먼저 가벼워졌다.
“식민사관은 이제 극복됐다”는 취지의 발언 역시, 현실을 모르는 순진함이거나 현실을 가리려는 의도에 가깝다. 식민사관 논쟁은 ‘광복이 오래됐느냐’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과정, 교과서 집필 기준, 학계 인사 구조, 연구 지원 체계, 대중 서사의 관행 같은 구조 속에서 오래 남는다. 그 구조를 들여다보지 않고 “언제적 식민사관이냐”고 조롱하는 순간, 그는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사람을 논박하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행위 자체를 비웃는 것이 된다. 질문을 비웃는 사회는 검증이 발전하지 않는다. 침묵만 발전한다.
결정적으로, 그의 발언은 자기모순으로 끝난다. “정치인이 역사 논쟁에 관여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한 사람이, 정작 그 자리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관여한다. 결론을 선포하고, 상대를 낙인찍고, 비유로 조롱하고, 청중의 분노를 조립한다. 이것은 학술적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둘러싼 사회적 에너지를 ‘비이성’으로 규정해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능숙한 프레이밍이다.
마지막 장면은 더 노골적이다. 그는 “숫자나 디테일이 틀릴 수도 있다, 라방의 맛”이라고 웃으며 넘긴다. 그런데 앞에서는 “역사는 믿는 게 아니라 증명”이라고 했다. 증명을 들먹이는 사람이 정확성은 ‘맛’으로 처리한다면, 그 실증주의는 학문이 아니라 포장지다. 검증을 말하면서 검증을 수행하지 않는 말, 그 말이야말로 논쟁을 망친다.
이 라이브는 그래서 ‘환단고기 논쟁’이 아니라 ‘공론장의 품격’에 대한 사건이다. 한동훈 전 대표의 말은 “나라 수준”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나라 수준을 떨어뜨리는 가장 쉬운 길—질문을 조롱하고 논쟁을 봉쇄하며 권위를 앞세우는 길—을 택한다.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틀린 주장보다도, 틀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질문을 미리 죄로 만드는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는 언제나 ‘만장일치’라는 단어 뒤에 숨는다.

진서론을 주장한 90편의 논문, 그리고 그 논문을 쓴 수십명의 학자들은 만장일치인가? 다수의 논문으로 보면 오히려 진서론이 만장일치에 가깝다. 단언적인 발언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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