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월곡,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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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차월곡 이외에도 갑종 요시찰인에 편입되었던 인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문일평(文一平 1888-1936)도 1917년 1월부터 경찰의 갑종 요시찰 인물로 편입되어 감시를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조선어학회 중진으로 항일투사이자 평북 영변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목숨 걸고 민족 얼을 사수한 이윤재(李允宰 1888-1943)도 1925년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은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하고 감시하였다.
그리고 광주·전남 근현대사 및 한국기독교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1921년에 식민권력으로부터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면 191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17년 차월곡은 어떤 행동을 했기에 갑종 요시찰인이 되었을까? 1910년대 차경석에 대한 자료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더욱이 그 사유를 밝혀주는 직접적인 자료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추정해 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당시 강증산의 제자들 중 차월곡과 박공우, 신경수 등이 동학교도들이었고 증산도 동학혁명을 직접 목도하고 따라 다녔다. 그런 점에서 동학과 동학혁명은 증산사상의 형성 그리고 차월곡의 보천교 성립의 필요조건인 셈이었고, 일제 식민권력이 차월곡과 보천교를 좌시할 수 없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더욱이 일제 식민권력은 1910년 8월 29일 한국강점 이후 한민족의 반일저항운동의 가능성을 전면 차단시키고 있었다. 강점 직후 부령(府令)으로 3인 이상의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1910.8)시키면서 「집회취체령」을 공포했고, 전국의 정치·사회단체들을 모두 해산시켰다(9월).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인이 저술한 각 학교용 교과서를 몰수하는가 하면 학교교과서를 조사하여 식민통치에 방해되는 문구나 학생들에게 구국사상을 고취시킬 수 있는 창가 등도 삭제했다. 소위 식민지 치안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통제·말살해 나갔다.
그러나 종교단체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19세기 서구열강을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단체들과, 1910년 전후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던 일본불교와 기독교 및 교파신도 단체들을 통제해 나가야 했다. 물론 일본에서 들어온 종교단체들의 경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기독교와 19세기 동학으로부터 비롯된 식민지 조선의 민족종교들은 민족의식과 구국사상 고취라는 점에서 항시 감시의 눈을 뗄 수 없는 단체들이었다.
식민권력은 이러한 종교단체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식민권력은 어렵게 획득한 식민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종교단체는 그 균형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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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야마 지준, 자료제공 : http://m.blog.daum.net/clftjd576/17747247) |
특히 민족종교들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유사종교』를 정리한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에 따르면, “조선의 신흥 유사종교는 항상 사회운동의 주체가 되어서 근세 이후의 조선 사회운동에 대단히 큰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운동이 조선사회의 진동(進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주의를 촉구했다. 또 “조선 유사종교단체의 대부분이 이름을 종교라고 빌린 정치운동 단체라는 세평(世評)은 종래 자주 들은 바이지만, 유사종교의 조선 및 조선민중에 준 영향 중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것을 관찰하면 그 수는 결코 적지 않다”고 했다.
곧 유사종교는 혁명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가능성이 농후하여 19세기 말의 동학혁명, 그리고 일제강점기 발생했던 3·1운동과 같은 항일운동으로 확산되기 쉬운 비종교적인 단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21년 요시가와 분타로(吉川文太郞)도 『조선의 종교』에서 종교유사단체는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동일한 주의를 표방하는 무리들이 모여서 하나의 단체를 조직한 것”이라 할 정도였다. 난잔타로(南山太郞) 역시 「비밀결사의 해부」라는 글에서 직접적으로 “조선 내의 비밀결사란 바로 종교 유사단체를 일컫는다.”고 적시했다. 그리고 그러한 비밀결사를 소유한 종교유사단체들 중 하나로 보천교를 지적했던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강점 초부터 동학과 여러모로 연결되었고, 종교포교와 함께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가는 차월곡의 움직임은 식민권력의 입장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욱이 “전북 정읍 보천교의 경우, 교주 등극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현혹하고 혹은 시국을 빌미로 불온언동을 일삼고 또는 풍속개선, 단발장려에 반대를 표명하는 등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라는 사례들도 확인된 상태였다.
그러한 사유들로 인해 차월곡은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식민권력의 보고서도 차월곡이 ‘은밀히 교세확장의 수단으로 국권회복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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