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이라는 이름을 지워 역사를 부정하는 쉬운 방법에 대하여
“근대 문헌에 처음 보이면 곧 창작인가”
박종인 기자는 “배달이라는 말이 근대 대종교 문헌, 특히 『단군교포명서』에 처음 등장하므로 배달국은 없었고, 배달은 만들어진 말”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료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벗어난, 지나치게 단순한 추론이다.
어떤 용어이든 ‘현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시점’과 ‘그 개념이 역사 속에서 처음 생겨난 시점’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는 역사학의 ABC다.
1. ‘최초 기록 = 최초 존재’라는 오류
역사 용어의 최초 기록은 언제나 우연과 전승의 결과다.
삼국지 마한전에 나오는 “마한 소국 50여국”의 숫자가 판본마다 다르다고 해서, 어느 판본이 ‘거짓’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기록의 차이는 곧 전승 과정의 흔적일 뿐이다.
그런데 배달이라는 이름은, 단 하나의 이유 ― “근대 문헌에 먼저 보인다” ― 만으로 창작어로 낙인찍힌다. 이는 학문이 아니라 재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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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교가에는 배달나라가 후렴으로 반복해서 나온다 |
2. 대종교 문헌은 ‘창작의 시작’이 아니라 ‘정리의 결과’
박종인 기자의 논리는 대종교를 “모든 것의 발명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다.
이에 대한 박덕규 박사의 연구는 분명히 말한다.
대종교는 ‘배달’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전승·혼용되던 여러 언어 요소를 종교적·사상적으로 재정식화했을 뿐이다 (박덕규_ 배달의 뜻과 유래_역사와 융합 14호)
‘배달’은 박달(朴達)
밝달은 밝은 땅
백달·백산(太白)
신단수·태백산 신시 전통과 같은 고대적 언어·상징 체계의 집합적 표현이다.
즉, 1904년은 ‘탄생 연도’가 아니라 ‘문헌 정리 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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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달국’은 국가명이 아니라 문명 단계의 명칭이다
배달은 애초부터 근대 국민국가적 의미의 ‘국명’이 아니다
.
환웅천황의 신시 전통
태백산·신단수 중심의 개천 서사
하늘(桓)과 땅(檀)의 광명 구분
삼천 무리와 인간 교화 체계
이 모든 요소는 정치국가 이전의 문명 단계를 가리킨다.
‘배달국’은 오늘날 말하는 왕조 국가명이 아니라, 개천 문명권·신시 문명권에 대한 명명이다. 이를 두고 “국가가 아니니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구석기 사회에 헌법이 없었다고 해서 인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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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고 말하기 전에, 검토는 했는가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박종인 기자는 『규원사화』의 박달 개념을 검토했는가?
『삼국유사』의 신단수·신시 구조를 언어사적으로 분석했는가?
‘환(桓)–단(檀)–밝달–배달’의 음운 전이를 검토했는가?
고려·조선 시기 환웅 인식의 축소 과정을 비교했는가?
이 모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기 처음 나오네? → 창작!”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요약이다.
5. 이름을 지운다고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다
‘배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말의 어원·기능·문명사적 맥락을 비판하면 된다.
그러나
존재의 복합성을 검토하지 않고 전승의 층위를 무시한 채 근대 문헌 등장을 이유로
역사 전체를 ‘없던 것’으로 만드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인 폭력이다.
역사는 단어 하나로 지워지지 않는다.
배달은 ‘창작된 신화’가 아니라, 후대 문헌으로 겨우 이어진 오래된 기억의 이름이다.
그리고 역사가 불편하다고 해서 “처음 적힌 때가 늦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억을 삭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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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동아일보 2019-01-24 |
위 내용은 박덕규_ 배달의 뜻과 유래_역사와 융합 14호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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