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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것! |
이 매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오늘날 교과서에서 단군조선의 건국사와 홍익인간의 이념이 점점 희미해지는 현실은 단순한 서술상의 공백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 고대사의 기원과 정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실증’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해석의 틀 속에는, 식민지 시기 형성된 역사 인식과 중화 중심적 사고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기록이 소실된 역사, 그리고 스스로의 뿌리를 부정하며 수서령을 내렸던 권력의 기억과도 겹쳐진다.
최근 고고학 연구는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 등을 통해, 동북아 고대 문명권의 실재와 그 복합적 성격을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 이를 단군조선과 직접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고조선이 단순한 신화적 산물이 아니라 실체를 지닌 정치·문화적 기반 위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제도권 학계 안팎에서는 여전히 고조선 실재론을 제기하는 시도들을 ‘유사 사학’으로 일괄 규정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 사이 중국은 요·순 시기를 역사적 실재로 확정하며 고조선을 주변 지방 정권 혹은 속국으로 위치시키는 서술을 강화하고 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는 ‘사근동후’와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은 요·순 시기 중원의 대홍수 상황과 더불어, 단군과 태자 부루, 그리고 순임금 사이의 관계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태자 부루가 도산으로 파견되는 과정, 낭야 지역에서 순이 사악을 거느리고 조근했다는 대목, 우에게 치수법을 전했다는 기록 등은 『서경』에 등장하는 표현들과 일정한 대응 관계를 이룬다. 특히 순임금이 동방을 향해 네 차례 조근했다는 서술은 『서경』 「순전」의 ‘사근동후(肆覲東后)’ 구절과 맞물리며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현재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위서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사료의 가치는 단순한 진위 판별을 넘어, 동시대 기록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최근 발표된 한 『서경』 연구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 「『서경』 「우서·순전」 동후(東后)의 본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빈례를 중심으로―」(2023)는,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이해되어 온 ‘동후’ 개념에 대해 기존과 다른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논문은 순임금의 섭정 초기 행보, 특히 동쪽으로 향해 ‘동후’를 만나는 장면에 주목한다. “사근동후 협시월 정일 동률도량형 수오례 오옥삼백이생일사지”라는 구절은 책력 조정, 도량형 통일, 오례의 시행 등 국가 간 질서 설정과 관련된 핵심 요소들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기록을 화이론적 관점에서 제후를 통제하는 장면으로만 해석해 온 기존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며, 삼례(『주례』·『의례』·『예기』)에 근거한 의례 분석을 시도한다.
특히 ‘근례(覲禮)’는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 행하는 의례로 정의된다. 『예기』 「곡례하」에 따르면, 천자는 의(依)를 등지고 서고 제후는 북면하여 이를 행한다. 이러한 의례 규정을 『서경』의 ‘사근동후’에 적용할 경우, 순임금이 동방의 정치체를 향해 근례를 행했을 가능성 또한 해석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 이는 동후를 단순한 지방 제후로 보는 기존 인식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또한 책력과 도량형의 조정은 천자의 고유 권한으로 여겨져 왔다. 순임금이 이를 ‘동후’와의 만남 속에서 조율했다는 기록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 질서에서 동방 정치체가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옥과 비단, 생·사폐로 구성된 빈례의 폐백 역시 위계 질서를 전제로 한 의례 체계 속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게 공자의 말로 시선을 옮기게 한다. 『논어』 「선진」편에서 공자는 “예악의 선진은 야인이요, 후진은 군자라 하나니, 내가 택한다면 선진의 예악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야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일부 해석은 이를 중원 문명 바깥의 선진 예악 전통, 즉 동방 문화권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당시 동북아 질서 속에서 중원과 동방 사이의 문화적 위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서경』 「순전」의 ‘사근동후’ 기록과 이를 둘러싼 의례 해석은, 단군조선과 중원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종속 구조로만 설명해 온 기존 서술에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곧바로 특정 사서의 진위를 확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환단고기』의 기록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 자료들을 보다 폭넓은 비교 연구의 장으로 불러내는 계기는 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에 머무는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뿌리다. 단군조선을 둘러싼 논쟁 역시 신화냐 역사냐의 이분법을 넘어, 남아 있는 기록과 고고학적 성과를 어떻게 성실하게 읽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료의 부족을 탓하기보다, 해석의 빈곤을 경계하는 태도가 지금 우리 고대사 연구에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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