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요하문명은 지금의 만주는 물론 내몽골과 하북성 일대에서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문명인데,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을 포괄하는 여러 문화 중의 하나다. 중국에서는 요하문명을 ‘홍산 제문화(諸文化)’라면서 ‘홍산제문화=요하문명’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문명은 우리 동이족 선조들이 만든 문명인데, 물론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은 무조건 우리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희한한 것은 연구도 하지 않고 부정부터 한다는 것이다.
초기국가 단계 돌입
요하문명의 시작은 소하서(小河西) 문화로서 대략 B.C. 7000~B.C. 6500년 사이의 신석기 문화다. 이를 한국사와 연결시킬 수 있다면 한국사를 만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를 한국사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보다 많은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소하서문화는 흥륭와(興隆洼) 문화(B.C. 6200~B.C. 5200)→사해문화(査海文化:B.C. 5700~B.C. 5500)→부하문화(富河文化:B.C. 5200~B.C. 5000)→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B.C. 5000~B.C. 4400)로 연결되어, 드디어 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에 도달한다. 홍산문화는 전기(B.C. 4500~B.C. 3500:신석기)와 후기(B.C. 3500 - B.C. 3000:동석병용〔銅石竝用〕)로 나눌 수 있는데, 중국에서도 홍산문화 후기에는 초기 국가단계 및 초급 문명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제천 유적과 천문유적
홍산문화 중에 ‘하늘〔天〕’과 관련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요녕성 서북부 건평(建平)현 우하량(牛河梁) 유적과 객좌현 동산취(東山嘴) 유적이다. 1983년에 발견된 우하량 유적(B.C. 3500~B.C. 3000)에서는 ‘제단(壇)·신전(廟)·무덤(塚)’이라는 이른바 ‘단·묘·총(壇廟塚)’을 모두 갖춘 유적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동산취 유적에서도 임신한 여인의 소조상(塑造像) 등이 발견되었는데, 중국을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이 유적들이 모두 동이족 유적이라는 것이었다. 중국학자들도 연구 초기에는 이를 동이족 유적으로 보았다. 중국의 이민(李民)이 1987년 「우하량·동산취 홍산문화의 귀속문제에 대한 시론(試論 牛河梁 東山嘴 紅山文化的歸屬)」에서 이 유적은 동이족의 일족인 ‘조이(鳥夷)’의 문화 유적이라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만주 전역을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 논리가 횡행하면서 이민의 주장은 폐기되고 지금은 황제(黃帝)의 손자 전욱족(顓頊族)의 유적이라는 것이 중국측의 억지 주장이다.
하왕조, 은왕조의 기원?
요하문명은 중국인들이 자랑하던 세계 4대 문명, 즉 중원의 황하문명보다 1000년 더 빠르다. 그래서 요하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켜야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욱족의 후손인 요하문명 건설자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夏)왕조를 정복하고 상(商=은〔殷〕)문명을 건설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역사관련 국책기관, 즉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중에 단 하나라도 한국의 관점으로 이 분야를 연구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지만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에게 한국인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자체가 무리라는 점은 수없이 확인했다.
제천 유적과 천문유적
내가 우하량, 동산취 유적에서 주목하는 것은 두 유적에서 시간을 측정하고, 천문을 관측하는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5천여년 전의 우리 선조들은 태양과 달을 관측하고 별자리를 관측했다. 이때 이미 천문학이 있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두 유적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 유적이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天孫) 사상의 발현이자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혈통을 하늘의 자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나,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나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하늘의 아들로 그리고 있는 것 등은 모두 이런 천손사상의 반영이다.
지금보다 살기 좋았던 홍산지역
요하문명 지역은 그때가 지금보다 살기 좋은 자연환경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리 춥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0~6000년 전 내몽골 적봉(赤峰) 지역의 년 평균기온은 6.5~7.5도였고, 가장 더운 달은 23~24도 정도, 가장 추운 달은 영하 11~영하 12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발굴된 사람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65.40cm, 여성이 161.93cm으로서 큰 체격이었다. 그만큼 영양상태가 좋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란 자부심이 있었고, 천문을 관측했던 것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오성취루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라는 기록이 있다. 무진년은 B.C. 1733년인데, 이해 오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서방 7수(宿) 중의 하나인 루성(婁星)옆에 모였다는 뜻이다. 전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는 실제 오성취루 현상이 발생한 때는 서기전 1734년이라면서 달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이는 정확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전율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이 사실인지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결론 내려야 할 문제지만 적어도 이 기록은 실제 발생했던 천문현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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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물론 우리 역사를 무조건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학문으로 착각하고 사는 식민사학자들은 이 기록도 또 흠을 잡겠지만 이 기록은 홍산문화의 우하량, 동산취에서 천문관측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해석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이후 중화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데다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식민사관이 맹위를 떨치는 나라의 불쌍한 후손들이기는 하지만 그 선조들은 5천여 년 전에 이미 하늘을 관측하고 하늘에 제사지냈던 천손의 후예였다. 이 천손 사상을 잃어버린 결과 우리는 중국, 일본, 미국의 노예 노릇하는 것을 즐거이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비단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이 천손 사상을 되찾는 것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린 채 비틀대는 이 사회를 바로잡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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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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