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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왕정복고 실패 후 환단고기 창조?…학문의 탈을 쓴 인격 살인 !

한국 제정복고 미수 사건 또는 한국 제정복구 미수 사건은 한국의 역사학자 이유립이 6.25 전쟁의 혼란을 틈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 폐위시키고 영친왕을 옹립, 황실을 복구하려던 사건이다. 다년간 자금과 사람을 모으고 일본에 있는 교포단체와의 접선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부산중부경찰서 형사가 이들을 미행, 추적하여 이유립 외 7명이 체포되었다. (위키피디아)

당시 검찰은 '왕정복고'라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발상을 '공산혁명'이라는 붉은 색깔과 억지로 버무려 기소했다. 근왕파와 공산당이라니, 그야말로 '짜장면에 케첩을 탄' 수준의 조잡한 기획 수사였다. 결국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오늘날 박종인 같은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유립을 '왕정복고라는 망상의 실패 후 역사를 창조한 인물'로 매도하곤 한다.

복벽주의는 망상이 아니다

'복벽(復辟)'은 잃어버린 왕조나 군주정을 되살리자는 뜻이며, '복벽주의(復辟主義)'는 이러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사상이나 운동을 의미한다.  근대 전환기의 조선과 대한제국을 살아간 인물들에게 “왕정을 택할 것인가, 공화정을 택할 것인가”는 아직 답이 정해지지 않은 열린 질문이었다. 

오늘 우리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그 결과를 알고 있는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바라보며 왕정을 선택한 이들을 “망상가”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후적 오만에 가깝다.

실제로 독립운동 진영은 단일한 노선이 아니었다. 상해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공화주의와 군주제 복원론은 오랫동안 공존했고, 갈등하며 논쟁했다. 그 과정에서 “황제를 다시 옹위하자”는 생각은 비이성도, 망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주권의 연속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였다. 따라서 복벽주의를 정신적 결함이나 망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역사를 재판하려는 태도다.

이유립의 부친 이관집 선생이 일본에 남아있는 영친왕 옹위를 유언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무게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황제의 나라가 존재하던 시절을 살았고 황제가 실재하던 체제를 경험했고 그 체제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폭압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에게 왕정 복원은 사치스러운 향수가 아니라 삶의 질서와 의미를 회복하려는 마지막 절규였을 수 있다..

이를 두고 ‘망상’이라 부르는 것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독립운동가의 선택을 지나치게 가볍게 다루는 일이다. 선택은 역사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곧 망상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처해 있던 당시의 조건 속에서 공산주의를 하나의 방편으로 선택하거나, 복벽주의를 대안으로 택했던 일들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식민지 현실 속에서 가능한 모든 길을 모색하던 그들의 선택을, 사후적 도덕 판단으로 단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성실한 태도라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위서론자들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아 일본에 억류돼 있던 영친왕을 다시 복위시키고자 했던 이유립 선생의 선택을 문제 삼으며 그를 망상꾼으로 몰고 가며 그의 행적을 ‘친일파’로 몰아간다. 삼일혁명에 참여했고, 청소년 시절 천마산대를 오가며 만주 지역 통신원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던 인물을, 오직 『환단고기』를 위서로 규정하기 위해 어이없게도 친일파이자 친일사관의 주창자로까지 낙인찍고 있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무리한지 금세 드러난다. 그의 일제강점기 삶은 철저히 항일의 궤적 위에 놓여 있었고, 해방 이후에 이르러서도 그는 식민지 잔재를 극복하고 끊어진 국통을 되돌리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살았다. 그 끝자락에 놓인 복벽 인식 역시, 개인적 정치 선택이 아니라 아버지 세대가 남긴 유언과 시대적 과제를 이어받은 역사적 태도였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 인간의 독립운동 이력과 역사적 선택을 이렇게까지 뒤틀어야만 성립하는 위서론이라면, 그 논리 자체가 이미 깊은 균열을 안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안타깝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유립, 이석영 등 10여명의 이름이 써 있는 편지가 쓰인 1961년은 영친왕이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 중이던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 편지처럼 각계각층의 귀국 탄원과 혁명 정부의 결정이 맞물려, 마침내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은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의식불명 상태에 가까워 병상에서 여생을 보내시다 1970년에 서거하였다.

위서론자의 황당한 망상 소설 쓰기

검찰은 이유립 일당이 영친왕을 추대해 '대달(大達)'이라는 나라를 세우려 했다며 국가보안법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우려던 국가의 강령은 외세 배격과 남북 사상 통일이었을 뿐,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결국 반년의 옥고 끝에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위서론자들은 이때의 좌절이 이유립으로 하여금 『환단고기』를 '창작'하게 만들었다고 소설을 쓴다. 특히 박종인은 이유립이 왕정복고가 허망한 꿈임을 깨닫고 국사 정립에 열을 올려 『환단고기』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역사적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게으른 비판일 뿐이다.

실증적 반격: 오형기 선생과 1949년의 '정서(正書)'
 
이들 위서론자의 주장은 오형기(吳炯基)라는 실존 인물과 그가 남긴 기록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다. 이유립이 1952년 사건 이후에 환단고기를 창작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실증적 근거가 바로 오형기의 존재다. 

이유립 선생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오형기 선생의 모습

오형기는 위서론자들의 주장처럼 정체불명의 존재가 아니다.  오형기는 결코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생애와 자취를 지닌 실존 인물이었다. 「오형기 『환단고기』 발문에 대한 고찰(2023)」 논문은 그동안 막연한 의혹과 추정 속에 놓여 있던 오형기의 실체를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통해 선명하게 복원해냈다.

이 논문의 가장 큰 성과는 오형기의 장남 오영상 씨와 며느리 백순옥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활동을 실제 인물의 궤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오형기는 단순히 글씨를 대신 써주는 필경사가 아니라, 전남 해남에서 ‘해양서당’을 운영하고 향교에서 활동하던 한학자였다. 그는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한학자였던 변시연, 위계도 등과 교류할 정도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그 학문적 깊이는 곧 그의 필체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었다.

유가족의 증언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현재 전하는 『환단고기』 원문의 필체를 본 유가족들은 “우리 아버지 글씨가 맞다”고 한목소리로 증언했으며, 오형기가 직접 쓴 집안의 역사인 가승(家乘)과 「삼일신고」를 병풍으로 만든 유물은 그가 독보적인 세필(細筆)의 대가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영상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오형기는 큰 글씨에는 다소 서툴렀지만 작은 글씨에서는 마치 인쇄한 책처럼 정교하고 치밀한 필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 때문에 그는 당대에 책을 만들 때 서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환단고기』라는 책명이 이미 1949년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위서론자들은 이유립이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환단고기』라는 서명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 논문은 1949년 기축년에 오형기가 직접 쓴 발문을 통해 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형기는 1949년 이유립의 부탁으로 정서를 마쳤을 당시, 이미 그 책을 『환단고기』라 명확히 기록했으며, 이후 1979년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까지 포함해 총 세 차례에 걸쳐 『환단고기』를 정서하며 이 책의 전승과 보전에 기여했다.

이 모든 사실은 오형기를 ‘실체 없는 이름’이나 ‘조작된 인물’로 치부해 온 위서론의 전제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오형기는 기록 속에서만 떠도는 존재가 아니라, 학문과 필력을 갖춘 한학자로서 살아 숨 쉬며 『환단고기』 전승의 한 축을 담당했던,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다.

결정적인 사실은 오형기가 『환단고기』를 처음 정서한 시점이다. 오형기는 1949년 3월 16일(대영절), 강화도 마리산에서 이유립 선생을 만났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의 부탁을 받은 뒤, 그해 5월 상순에 『환단고기』 정서를 완료했다. 이는 이른바 ‘왕정복고 사건’이 발생하기 무려 3년 전에 이미 필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당시 오형기가 정서한 원고에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즉, 오늘날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 창작의 계기라고 주장하는 1952년 왕정복고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환단고기』라는 이름의 책은 실질적인 형태를 갖추고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1911년 초간본 『환단고기』 외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서예의 대가를 만나 이 책을 보다 정연하고 온전한 형태로 남겨야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의 정서를 맡겼다는 점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왕정복고 사건 이후에 『환단고기』를 새로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시간적 순서 자체에서 성립할 수 없는 오류임이 분명해진다.

물론 1979년을 『환단고기』의 최초 등장 시점으로 고정해 놓은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그 틀 안에서만 추리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짜깁기한 시나리오에 맞아떨어지는 문장 하나만 발견해도, 그것을 근거 삼아 멋대로 추론을 확장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49년본의 주인공 오형기 선생은 이유립 선생이 198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위원장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위서론을 밀어붙이려면, 결국 이유립 선생뿐만 아니라 오형기 선생과 그의 자식들까지도 모두 ‘사기에 공모한 인물’로 몰아가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오늘날의 위서론이 스스로 얼마나 무리한 가정 위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일부 비판자들은 오형기 선생 발문(정확하게는 발문이 아니고 발문을 청하는 글이다) 에 등장하는 '대시전(大始殿)'이 1970년에 건립되었으니 1949년 기록은 가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1차 사료를 제대로 읽지 않은 무지의 소치다. 1970년 건물을 짓기 전에도 마리산에는 천제를 지내기 위한 임시 건물이 있었으며 이를 관습적으로 '대시전'이라 불렀다. 오형기는 『환단고기』를 정서하며 환웅 천황의 유상을 모신 전각인 '대시전'의 역사적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당시의 제천 공간을 당연히 그 이름으로 기록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 우리 손에 ‘1949년본’이라는 실물은 없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애초부터 학문적 검증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부재를 전제로 상대를 궁지에 몰기 위한 수사에 가깝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물증 하나를 끝없이 요구함으로써, 그 이전과 이후에 축적된 모든 정황과 증언, 문헌 관계를 한꺼번에 무효화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1949년본이 없다는 사실이 곧 위서의 증명이 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이미 출발선에서 무너진다.

 그들이 말하는 ‘1949년본 요구’는 선택적 증거주의다.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실물 초고가 남아 있지 않은 수많은 근대 문헌과 독립운동 관련 기록들 역시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유독 『환단고기』와 이유립에게만 이 잣대를 들이댄다. 이는 학술적 엄정함이 아니라, 결론을 정해놓은 공격일 뿐이다. 1979년으로 말이다.


결론: 학문의 탈을 쓴 모독을 멈추라

이유립의 왕정복고 시도는 부친 이관집의 유훈을 받든 독립운동가 가문의 올곧은 기개였다. 일제에 항거하고 해방 후 외세의 파도를 마주하며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진심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위서론자들은 오형기가 남긴 1949년 환단고기에 대한 기록과 그 실존적 증거들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의 편견에 역사를 꿰맞추는 위서론자들의 행태야말로 진짜 '창작'이자 '왜곡'이다.

이유립은 왕정복고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 전부터 이미 우리 역사의 정수를 담은 사서를 보존하고 있었다. 1949년 오형기의 정서본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의 실패한 정치적 야망의 산물이 아니라, 끈질기게 이어져 온 한민족 국통맥의 증거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제라도 무책임한 매도를 사과하고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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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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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벅종 2026-01-15 22:43:14

    양심은 있냐 홍보실 직원? 단 한 글자도 팩트가 없네 ㅎㅎ 똑바로 써라 아이고^^   삭제

    • 환웅 2026-01-10 00:58:17

      ㅋㅋㅋ 커발한 개천각에 일본식 카쓰가 석등 있는 거 봐라. 커발한이 토착왜구인듯. 종교와 학문을 혼동하는 무리들이 하는 짓이 그렇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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