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방구석에서 단어 몇 개 조합해 소설을 쓰는 영역이 아니다. 이양재 대표는 자신의 빈약한 학술적 토대를 가리기 위해 특정 가문을 공격하는 저급한 행태를 즉각 중단하라. 국혼을 지켜온 고성이씨 문중과 『단군세기』의 진실 앞에 사죄하는 것만이 그가 학자로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양심일 것이다."
애서운동가 이양재 대표는 고성이씨의 사대성(事大性)이라는 자극적인 용어를 내걸고, 고성 이씨 문중 전체를 일반화하며 폄훼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는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이를 후손 이유립이 지어낸 이야기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료 검토나 학술적 근거 없이 특정 가문과 인물을 동시에 욕보이는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논쟁은 치밀한 문헌 검증과 학문적 논증으로 이루어져야지, 특정 성씨나 인물을 낙인찍는 방식으로 다루어질 사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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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재의 글을 보자
"박은식 신채호 이래 민족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존재를 부정하니,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고성이씨세보(固城李氏世譜)]는 그 첫 기록부터 사대성이 드러난다" (이양재 글 중)
"이 실존 인물 이황을 한사군 시대에 조선에 왔다는 가공(架空) 인물 이반(李槃)의 후손이라며 고성이씨에게 사대적 정체성을 넣는다" (이양재 글 중)
이양재 공동대표가 제시한 한문 원문의 정확한 번역을 제공해 드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 대표의 주장에 어떤 논리적 허구와 오류가 있는지 조목조목 반박해 보겠다.
1. 한문 원문 분석 및 정확한 번역
제시하신 원문은 두 가지 버전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핵심은 시조 이황(李璜)의 선대 기록이다.
[원문 1]
漢文帝時 諱槃 諡文景后 二十四世孫 諱璜云而 玄遠不可攷
번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이름은 반(槃)이요, 시호는 문경후(文景侯)인데, (그의) 24세손이 휘(諱, 이름) 황(璜)이라고 전해지나, 그 아득히 먼 예전의 일은 고찰(검증)할 수 없다.
주석: 원문의 '后'는 문맥상 제후를 뜻하는 '侯'의 오기로 보인다.
[원문 2]
遺乘云, 漢文帝時, 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 槃後孫, 以都護元帥, 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 而玄遠不可考
번역: 남겨진 기록(유승)에 이르길, 한나라 문제 때 이반(李槃)은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토벌할 때, 이반의 후손이 도호원수(都護元帥)로서 (조선에) 건너와 그대로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반의 24세손이 황(璜)이나, (그 사이의 계보가) 아득히 멀어 고찰할 수 없다.
2. 이양재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반박
이양재 대표는 위 기록을 근거로 고성이씨가 "시조의 원류를 한사군으로 주장하는 유일한 문중"이라며 '사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심각한 비약이자 오류입니다.
① '도호원수'와 '한사군'은 별개의 개념다
기록에는 이반의 후손이 '도호원수'라는 직책으로 왔다고 되어 있을 뿐, 그가 한사군(漢四郡)의 관리였다거나 한사군 땅에 정착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습니다. '조선에 왔다(出來)'와 '한사군에 임명되었다'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② '현원불가고(玄遠不可考)'의 의미를 무시했다.
족보 원문에는 명확하게 "너무 멀고 오래되어 고찰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당시 족보를 정리하던 후손들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단편적인 기록을 적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한 '솔직한 기술'이다. 이를 두고 문중 전체가 사대주의에 빠져 한사군을 옹호한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과도한 확대해석이다. 확증편향으로 미리 어떤 편견을 가지지 않고서야 굳이 이렇게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
③족보의 '도입부'와 '실제 역사'의 분리
조선 중기 이후 족보를 편찬할 때, 가문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중국의 유명 인물이나 관직자를 선조로 끌어오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적 현상(모화사상)이었다. 이양재 대표가 진정으로 식민사학을 청산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분석해야지, 특정 문중을 '한사군 옹호자'로 낙인찍어 공격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처사다.
요약하자면
이양재 대표의 글은 고성이씨 족보에 나타난 '기록의 불확실성(불가고)'은 외면한 채, 단어 몇 개(한무제, 조선토벌)를 연결하여 특정 가문을 사대주의, 사대 성향으로 매도하고 있다. 선조의 위대한 업적은 무시하고, 족보 서문에 적힌 불확실한 전승을 빌미로 가문을 비하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균형 감각을 상실한 행태라 할 수 있다.
특히 고성이씨 가문은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단군세기》를 저술한 행촌 이암(李嵒) 선생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암 선생은 한국의 주체적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다. 그런데 이양재는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한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79년 이전의 모든 고문헌에 행촌 이암은 유학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사대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행촌 이암은 [단군세기]를 저작할 사상적 징치적 배경이 고려시대에 없었으며, 누군가의 저술로 [단군세기]가 있었다고 해도 사대성에 함몰된 그 후손들은 이를 보존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양재 글 중)
"그러한 것을 고성이씨라고 주장하는 태백교주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라는 종교서를 만들어 이암의 저술로 주장하며, 이암이 우리 고유의 도를 주창한 인물로 그 모습(이미지)을 조성(造成)하였다" (이양재 글 중)
3. '유학자 이암'은 《단군세기》를 쓸 수 없다는 논리의 허구
이양재는 행촌 이암이 유학자였기에 사대주의에 매몰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단군세기》와 같은 민족 주체 사관의 저술을 남겼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고려 말의 특수한 시대 상황과 지식인의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단편적 시각에 불과하다.
외세 침략과 국혼의 자각: 이암이 활동한 고려 말은 원나라의 간섭이 극심했던 시기다.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지식인들이 민족의 뿌리와 정신(國本)을 찾으려 노력한 것은 당연한 시대적 요구였다.
유(儒)와 도(道)의 공존: 당시 지식인들은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 문화와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암은 유학의 틀을 넘어 민족의 시원을 밝힘으로써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를 '유학자=사대주의자'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4. 이유립 선생의 '조작설'에 대한 반박
이양재는 《단군세기》가 이유립에 의해 조작된 '종교서'라고 비하한다. 그러나 이는 기록의 전수 과정과 과학적 근거를 완전히 무시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가학(家學)의 전수: 《단군세기》는 고성이씨 가문의 가학으로 내려오던 비서(秘書)였다.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이를 수집하여 《환단고기》로 엮었고, 이유립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에 알린 파수꾼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내용의 정밀성과 과학적 증거: 《단군세기》에 기록된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은 현대 천문학 소프트웨어로 계산했을 때 실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20세기 인물인 이유립이 현대 과학의 도움 없이 이토록 정교한 천문 기록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외에도 단군세기의 기록 수십가지 이상이 그 사료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생략한다)

5. 역사를 수호한 문중에 대한 모독을 멈춰라
결론적으로 이양재의 주장은 '사대주의'라는 프레임을 억지로 씌워 고성이씨 문중의 자부심을 꺾고, 《단군세기》라는 위대한 유산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악의적인 시도다.
고성이씨 문중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해 만주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가문이다. 족보 도입부의 불분명한 전승 기록 하나를 빌미로 가문의 정체성을 '사대주의'로 낙인찍는 빌드업으로 결국 단군세기기 없고 사대성을 가진 후손들이 이를 전승할리도 없다는 비논리적인 추리로 독립운동가 가문. 충의의 가문을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가문으로 매도하였다. 이는 이 가문이 수호해 온 항일 투쟁의 역사와 민족 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이양재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방과 문중 전체를 향한 폄훼를 즉각 중단해야 하며, 고성이씨 문중과 우리 역사 속에서 항일과 독립의 가치를 지켜온 이들 앞에 분명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
특히 스스로를 독립운동가의 자손과 후손이라 말한다면, 그 이름이 지닌 무게를 먼저 자각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경쟁이나 낙인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가 지켜내야 할 공동의 유산이다. 다른 독립운동가 가문과 그 역사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최소한의 도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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