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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역사인물소개 - 정약전 - 편

"정약전,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편찬하다"
 

글 : 문경호(공주대 교수)

정약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세기의 첫 해인 1801년, 조선에서는 최초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신유박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노론 강경 세력들이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조의 탕평 정책에 따라 정계에 나온 남인 세력들의 대부분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그들 중에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도 있었다.

정약전은 1758년에 남양주 마재에서 진주목사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해남 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수의 손녀였다. 정약전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학문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았다. 형제 간 우애가 돈독했는데, 그 중에서도 약전과 약용은 사이가 각별하였다.

정약전은 어린 시절 이승훈, 김성원 등과 함께 어울리며 이익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승훈은 훗날 그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지간이 되었다. 이어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이승훈과 권철신은 모두 천주교에 심취한 인물로 신유박해 때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그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주변 인물들과 무관하지 않다.

정약전은 17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7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90년에는 병조좌랑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왕명을 받아 <영남인물고>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인을 중용하여 노론을 견제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자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 세력들이 축출되는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신유박해로 남인, 특히 정약전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의 큰 형 정약현을 제외한 약전, 약종, 약용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큰 형 약현은 천주교에 입교하지 않았으나 그의 부인은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이벽의 누이였고, 그의 사위는 ‘백서사건’으로 조선을 놀라게 했던 황사영이었다. 신유박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그의 집안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체포되어 나란히 유배길에 올랐다.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되고, 그는 신지도(薪智島)로 귀양갔다가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 흑산도로 이배(유배지가 옮겨짐)되었다. 그는 1807년에 대흑산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우이도에 살았다.

우이도에 머무는 동안 우이도 진리 마을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듣고 <표해 시말>이라는 책을 엮었다. 문순득은 흑산도로 홍어를 사러 나갔다가 갑작스런 비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을 전전하다가 3년 2개월만에 고향에 돌아온 인물이다. 만약 정약전이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지 않았다면 홍어장수 문순득의 흥미로운 표류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 푸르다 못해 검은 섬 흑산도(문화재청) >

대흑산도로 옮겨간 후에는 사리마을에 사촌서실(복성재)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흑산도에서 잡히는 226종에 달하는 어패류와 어초류의 이름과 모양, 습성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아 <자산어보(玆山漁譜)>를 편찬하였다. <자산어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어류도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산어보>의 자산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다. 흑산도는 푸른 바다와 나무들이 멀리서 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산어보>라는 책 이름은 정약전이 흑산도의 ‘검을 흑(흑)’자가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있음을 꺼려 같은 의미를 가진 자산(玆山)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편찬할 때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흑산도 토박이였던 장창대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었다. 물론 그 중 어류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 것은 창대였다.

< 자산어보(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백과 >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곧 창대(昌大)라는 소년이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물고기와 물새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만했다. 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창대는 뭍사람인 정약전이 모르는 어패류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정약전은 새로운 어패류를 볼 때마다 창대에게 물어서 기록하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충하여 책을 엮어 나갔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워하였다.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섬 생활에 육식을 하지 못할 형을 걱정하여 게를 요리하여 먹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보낸 것도 있다. 정약전은 정약용에게 서당을 짓고 난 후 서당기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유배생활 15년 만인 1816년에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동안 아우 정약용을 애타게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형의 죽음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그 슬픔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정약전이 죽은 후 2년이 지난 1818년에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는 형이 살았던 유배지를 찾아가 그의 흔적을 찾아 모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패류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제자 이청에게 책으로 엮게 하였다. 만약 정약용이 자료를 모아 엮지 않았더라면 자산어보는 세상에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약전의 생애는 불우했으나 그의 저술은 실학기에 제작된 여러 서적 중 어류에 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단지 옛 서적에 적힌 기록을 읽거나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집적 경험하고 관찰한 후에야 기록하였다. <자산어보>는 조선시대 흑산도 주민들의 어류에 대한 지식은 물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새로운 지식을 대하는 태도와 학문 방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의 도움을 받아 기사화합니다 -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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