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식(호 해창) 선생은 1921년 『유교유신론』을 저술한 개혁적 유학자로, 일제강점기 유교의 재건과 인재 양성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안순환이 조직한 조선유교회의 교육 이념에 공감해, 녹동서원에 설치된 명교학원에서 약 3년간 후학을 가르치며 유교·신학문을 겸비한 인재 양성에 참여했다. 해창은 유교의 사회적 갱신과 민족 도덕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같은 시대 조선유교회 인맥 속에서 이유립 선생과도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상적 교류선상에 있었다. 그는 유교 정신을 통한 광복과 대동사회를 꿈꾼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해창 송기식 선생의 『해창문집』에는 『환단고기』를 전수한 이유립 선생과 주고받은 서신이 정리되어 있어, 두 사람의 학문적·사상적 교류가 분명히 드러난다. 송기식 선생은 단학회 제5대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와 동문수학한 석주 이상룡 선생 역시 단학회 간부로 활동했다. 제5대 단학회장 이용담 재임 시기에는 송기식이 명예회장을 맡고, 이정보·이유필이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윤창수·이병걸·이유항·김찬정·이석영이 간사로 조직을 이끌었다. 송기식 선생이 별세했을 때에는 이유립과 이석영이 만사를 지어 그의 학문과 정신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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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단학회 명예회장으로서 『환단고기』의 역사를 기록과 구전으로 접해 온 송기식 선생은, 다른 유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우리 역사 속 잃어버린 고리인 북부여사를 정리한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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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기식 선생과 이유립 선생 |
송기식, 북부여사통론(北扶餘史統論)
역사 서술이란 기강을 세우고 인간 사회의 중심을 바로잡는 것이며,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벌하여 후세의 모범을 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필(史筆)이다.
성현과 호걸이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이 또한 사필이며, 난신적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사필이다.
단군은 우리 조국의 시조이며, 그 종통은 북부여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기자는 하나의 우방일 뿐이지, 혁명으로 조선을 계승한 정통의 시조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옛 사서는 잘못 기록하여, 기자를 단군을 혁명으로 계승한 계통으로 삼았고, 또 고구려를 기자 계통의 혁명 국가로 엮었으니, 사가(史家)의 잘못이 매우 크다.
단군의 나라는 남으로는 조령(鳥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렀으니, 북부여는 그 국토의 한가운데에 해당한다. 또한 단군 왕실이 북부여로 천도하여 머문 세월이 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기자가 동래했다고 하여 나라를 넘겨주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곧 북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자 왕조는 천 년 동안 북부여·고구려와 서로 대치하며 병존한 나라였을 뿐이다.
대체로 기자는 성인이었고, 주나라를 피해 동쪽으로 와 따르는 자가 오천 명이나 되었으며, 모두 문명 선진 세력이었다. 이로 인해 동방 사람들이 중화 문화를 사모하는 열기가 극에 달하여, 단군을 등지고 기자를 받들게 되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당·송·원·명·청의 강대한 세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니,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였다.
중화를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워질수록 조국에 대한 진정성은 식게 된다. 이것이 동방인의 오래된 기질이며, 오늘날의 나약함을 초래한 원인이다.
고구려는 조국의 유민이었으므로 중국에 맞서는 기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수·당이 실패한 것이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진정한 독립적 기질을 지닌 이는 을지문덕, 양만춘과 같은 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종통을 이은 나라로 200여 년을 존속했음에도, 동방인들이 이를 외국으로 여겼으니,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필을 곧게 세운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단군, 북부여, 고구려, 발해를 조국의 정통으로 삼고,
기자, 위만, 이부(二府)와 사군(四郡)은 모두 외국 또는 우방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야만 비로소 조국의 역사 계통이 바로 설 수 있다.
주자가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할 때 동주를 주나라의 정통으로 삼고, 촉한을 한나라의 정통으로 삼아 대의(大義)를 분명히 밝혔듯이, 우리 조국의 역사를 편찬하는 자 또한 마땅히 이를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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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사통론(北扶餘史統論)
扶綱立紀, 左右人類者, 史筆也. 彰善懲惡, 模範後世者, 史筆也.
聖賢豪傑之所愼也, 亂臣賊子之所懼也. 檀君, 我祖國之元祖
也, 而其宗系爲北扶餘, 則箕子乃一友邦也, 非革命之元統也
明矣. 舊史誤以箕子系檀君革命之統, 又以高句麗系箕氏革
命之統, 史氏之失甚矣. 檀君之國, 南至鳥嶺, 北至黑龍江, 則北
扶餘爲里程之中耳. 且檀氏遷都北扶餘者, 百有餘年, 箕子東
來, 則舊史讓與者非也. 高句麗始祖朱蒙, 卽北扶餘王解慕漱
之子, 則箕氏之千年爲對峙幷行之國耳. 蓋箕子, 聖人也, 避周
而至, 從者五千人, 皆文明先進者, 東人慕華之熱極矣, 乃背檀
氏而腹箕氏, 秉史筆者, 必畏唐宋元明淸之勢故耳, 主客反位,
固其勢矣. 故慕華之熱盛, 則祖國之誠冷矣. 此東人之流性, 而
致今日之懦弱也. 高句麗, 祖國之遺族, 故有敵華之熱, 而隋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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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所以取敗者也, 有獨立特性者, 乙支文德楊萬春數人而已.
且㴾海, 高句麗之宗統, 享二百年之久, 而東人視之爲外國, 可
勝嘆哉. 然則史筆之可直者, 則曰檀君, 曰北扶餘, 曰高句麗, 曰
㴾海爲元統, 曰箕氏, 曰衛滿, 曰二府四郡, 皆爲與國, 然後可立
祖國之統矣. 朱子之編綱目也, 以東周君系周統, 以蜀漢系漢
統, 而大義彰明矣. 編我祖國史者, 當以是爲法矣.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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