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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아시나요?한민족이 세상의 중심에 설 때....범은 다시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이미지 출처=신통방통

조선의 밤은 종종 한 짐승의 숨결로 흔들렸다. 《조선왕조실록》을 펼치면 ‘호(虎)’라는 글자가 무려 877차례나 등장한다. 성안으로 들어온 범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 근정전 뜰을 배회한 밤의 그림자, 삼군의 갑사가 동원된 포획 명령까지, 범은 단지 산속의 맹수가 아니라 왕조의 질서와 공포, 그리고 그 너머의 평범한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던 존재였다. 열 살 아이가 낫을 휘둘러 아버지를 물고 가던 범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인간과 범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숨을 섞고 살았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짐승을 무엇이라 불러왔을까.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호랑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름은 ‘범’이었다. ‘범’은 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토박이말이다. 반면 ‘호랑이’라는 말은 한자 ‘호(虎)’와 ‘랑(狼)’이 결합된 말줄기에 우리말 접미사 ‘이’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월인석보》가 편찬되던 시기만 해도 ‘호’는 범을, ‘랑’은 이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말은 하나로 섞였고, 결국 ‘호랑이’라는 표현이 표준처럼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산의 주인이었던 범은 새 이름을 얻었고, 그와 함께 오래 쓰이던 토박이말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이는 단순히 단어 하나가 바뀐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을 중심에 두고 기억해 왔는지가 말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변화였다. 말의 역사는 곧 정체성과 기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름이 바뀌어도 범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화 속 범은 늘 근엄하면서도 어딘가 어수룩하다. 까치 앞에서 위엄을 부리지만, 보는 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실록 속 범이 현실의 공포였다면, 민화 속 범은 민중의 웃음 속으로 내려온 존재다. ‘곶감과 범’ 이야기에서 범은 곶감이라는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힘이 아닌 지혜 앞에서 무너진다. 범은 늘 강하지만, 결국 인간의 슬기와 분별 앞에서는 길들여진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호랑이 더피의 모습

이러한 상상력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이른바 ‘케데헌’ 속 푸른 빛 호랑이 캐릭터인 더피(Derpy)는 조선 민화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은 존재로 알려졌다. 무섭기보다 친근하고, 거칠기보다 정의로운 모습의 이 호랑이는 한국적 상징이 현대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실록과 설화, 민화 속 범이 K-컬처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범과 달리, 현실의 범은 한때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해수구제害獸驅除’라는 이름 아래 한반도의 호랑이를 조직적으로 포획했다. 이 정책은 한반도 내에서 호랑이가 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국 호랑이의 가죽은 일본 군인과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전리품이 되었고, 그 결과 산은 침묵했다. 이는 단순한 생태 파괴가 아니라, 조선의 자연과 상징, 그리고 정신을 제거하려는 식민정책의 한 방식이었다.

이 시기, 홍범도 장군이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독립군의 영웅으로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이전, 지금의 북한 지역인 함경도 일대에서 호랑이를 잡는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산과 범의 습성을 꿰뚫고 있던 그의 감각은 훗날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유격전에 그대로 이어졌다. 범을 알던 자가 제국과 맞섰던 것이다.

1911년,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발간하던 시기에도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책의 간행 비용을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이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투쟁과 함께 역사의 뿌리를 되찾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총과 활만이 아니라, 기억과 기록 또한 독립의 무기였던 셈이다.

 

호랑이의 귀환 - 출처=골라듄다큐

오늘날 백두산 호랑이, 즉 시베리아 호랑이의 야생 개체수는 600마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개체 밀도가 높아지면서 일부 호랑이들은 중국 동북부와 북한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반도 북부의 산림이 여전히 범이 살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호랑이를 아시나요?

이 질문은 한 마리 짐승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일제가 조선인의 혼을 꺾고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상징으로 호랑이를 없애고자 했다. 그러나 호랑이가 살아 숨 쉬던 그 산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때, 한민족이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설 때, 범의 발자국은 가장 먼저 돌아온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제, 다시 깨어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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