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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찾기협의회: 메신저를 죽여도 메시지는 살아남는다

대한민국의 역사 인식은 해방 이후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자행된 식민사관의 주입(사실은 그 이전부터)은 단순한 통치 수단을 넘어, 한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자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거대한 지적 폭력이었다. 해방 이후, 이러한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학계 안팎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 1970년대와 80년대를 관통하며 활동했던 '국사찾기협의회'가 존재한다. 이들은 『환단고기』를 비롯한 사서들을 통해 단군 조선 이전의 역사, 즉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를 복원하고, 반도 사관에 갇힌 한국사의 지평을 만주와 대륙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 일부 미디어와 강단 사학계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재야사학의 노력을 '사이비 역사학' 혹은 '국수주의적 환상'으로 매도하며 격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비판의 방식이 사료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나 역사 철학적 논쟁보다는, 주장을 펼치는 인물들의 이력이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는 '메신저 공격(Messenger Attack)', 즉 인신공격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서론자들은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축이 되었던 박창암 장군, 안호상 박사 등의 인물이 군인 출신이거나 독재 정권과 연관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의 역사관 전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이를 '사회적 흉기'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메신저 공격의 논리적 오류와 비판의 허구성

 비판 세력은 『환단고기』와 국사찾기협의회를 비판함에 있어 내용 자체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자격'이나 '출신'을 문제 삼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여 특정 집단을 악마화하기에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학문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이다.

발생학적 오류(Genetic Fallacy)와 정황적 대인 논증(Ad Hominem Circumstantial)

비판론자의 주된 논리는 "박창암은 쿠데타 주역인 군인이고, 안호상은 이승만 정권의 관료였으며, 이들은 군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수주의 역사를 이용했다"는 도식으로 요약된다. 즉, 주장의 기원(Origin)이 군사 정권이나 비전문가 집단에 있기 때문에 그 주장의 내용(Content) 또한 거짓이거나 불순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발생학적 오류이다. 어떤 주장의 참과 거짓은 그 주장이 어디서 나왔느냐가 아니라, 그 주장이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느냐, 논리적으로 타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독재자가 "2 더하기 2는 4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수식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창암 장군이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가 발간한 『자유』지의 역사 논문들이 모두 거짓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진실은 발화자의 신분이 아니라 사료의 해석과 논증의 정합성에 달려 있다.

비판자들은 국사찾기협의회 인물들이 처한 '정황'(군사 정권의 일원, 비전공자)을 들어 그들의 편향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강단 사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칼날이다. 만약 군인 출신이라서 역사를 왜곡한다고 주장한다면, 일제 관학자들에게 교육받고 그 학맥을 이어받은 강단 사학자들 역시 '식민사관을 유지해야 자신들의 학문적 권위가 유지되는 정황'에 놓여 있으므로 그들의 주장 또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식의 논쟁은 끝없는 진흙탕 싸움일 뿐,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길을 막아버린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Appeal to Authority)

비판론자들은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검증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반복하며 주류 강단 사학계의 권위를 빌려 국사찾기협의회를 공격한다. 이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의 전형이다.

서구의 안정된 학문 풍토에서라면 '학계의 합의'는 존중받아 마땅한 기준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태생적으로 일제 식민 사학의 영향력 아래 형성되었다. 해방 후 강단을 장악한 이병도,신석호와 그 제자들은 일본의 실증 사학 방법론을 그대로 답습했고, 식민 사관의 핵심인 '반도 사관'과 '실증주의'를 학문적 표준으로 설정했다.

국사찾기협의회가 투쟁했던 대상은 바로 이 '오염된 권위'였다. 일제가 심어놓은 한사군 한반도설,임나일본부설 등 식민사관을 답습하는 학계가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학계가 인정하지 않으므로 가짜"라는 논리는, "일제 순사가 독립군을 범죄자라 했으므로 독립군은 범죄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순환 논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학문적 태도는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형성된 배경과 한계까지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다.

단체는 한사군 한반도설,낙랑군 평양설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 식민지가 420년동안 한반도 북부에 지속되었다는 식으로 오히려 더 강화되어있다.
전 세계 중국 한나라 지도 : 거의 대부분 한나라의 지도는 한반도 북부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는 한강을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런 지도는 한사군 한반도설에 기인한다

 

2. '메신저'들의 재발견: 그들은 누구였는가?

인신공격의 부당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격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비판론자들이 '비전문가', '정치 군인', '파시스트'로 낙인찍은 이들은 사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조국의 정신적 광복을 고민했던 지성인들이었다.

2.1. 박창암(朴蒼巖) 장군: 칼을 든 선비, 역사를 논하다

 

박창암 장군은 단순한 5.16 쿠데타의 주역이 아니었다. 그는 군인이기 이전에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으며, 평생을 청렴과 강직함으로 일관한 인물이었다.

박창암은 5.16 이후 혁명 검찰부장을 지냈으나, 군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고 투옥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 군인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권력과도 불화할 수 있는 원칙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편 후 월간지 『자유』를 창간하여 민족사관 정립 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어떠한 정부 지원도 받지 않고 사재를 털어 잡지를 발행했다. 그가 만약 정권의 입맛에 맞는 어용 역사를 만들려 했다면 막대한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얼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국사 찾기 운동을 이끌었다.

박창암의 기고문들은 단순한 감정적 호소가 아니었다. 그는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 경험과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한민족 고유의 정신 철학뿐임을 설파했다. 그에게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외세의 문화 침탈을 막아낼 '정신적 방파제'였다.

2.2. 안호상(安浩相) 박사: '한'의 철학자와 일민주의의 진실

 

안호상 박사(安浩相, 1902년 ~ 1999년)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는 흔히 '파시스트'로 매도된다. 학도호국단을 창설하고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그의 철학적 본질을 간과한 피상적 해석이다.

안호상은 독일 예나 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전공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의 일민주의와 단군 사상은 나치즘과 같은 배타적 인종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한(One, Big, Bright)' 사상을 통해 계급과 파벌로 찢어진 해방 정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통합의 철학을 제시했다.

 그가 문교부 장관으로서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로 삼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보편적 인류애를 담고 있다. 이는 파시즘의 침략적 속성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안호상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건국 이념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사상임을 확신했다.

안호상의 사상적 뿌리는 대종교에 닿아 있다.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역사 찾기 운동은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신채호, 박은식 등)을 계승하여, 일제에 의해 난도질당한 민족사의 맥을 잇고자 하는 숭고한 노력의 연장이었다.

2017년 1회 앞줄 왼쪽부터 윤정로 세계일보 부회장, 김선적 통일광복민족회의 의장, 이 전 총리, 김익수 한국효문화연구원 이사장 겸 홍익인간사상연구원장, 원영진 대종교 전 총전교.

2.3. 임승국(林承國) 교수: 강단에 맞선 재야의 포효

 

『환단고기』 번역과 보급에 앞장선 임승국 교수는 강단 사학계의 거센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1986년 출간된 그의 『한단고기』 번역본 서문은 단순한 책 소개가 아니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격문과도 같다. 그는 서문에서 "우리 역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난도질당했다"고 통탄하며, 강단 사학자들이 일제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안주하고 있음을 질타했다.

임승국의 번역본은 난해한 한문 원전을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역사 논쟁의 주체를 소수 엘리트 학자에서 일반 대중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역사는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민주적 역사 인식의 발로였다.

3. 식민사관의 실체와 국사찾기협의회의 투쟁: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나?

비판론자들은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을 '환상'이라 비판하지만, 정작 그들이 맞서 싸웠던 '현실'이 얼마나 참혹한 역사적 폐허였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국사찾기협의회의 활동은 단순한 과거 미화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파괴된 역사를 복원하려는 '문화적 독립운동'이었다.

3.1. 일제의 '사서 소각'과 증거 인멸의 역사

강단 사학계는  『환단고기』가 사료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가 자행한 전무후무한 사서 찬탈과 소각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취임 직후부터 전국적인 서적 압수 수색을 벌였다. 문정창이 저술한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에 따르면, 1910년부터 1년여 동안 압수되어 불태워진 사서의 수가 무려 20만 권에 달한다고 한다. 단군 조선, 고대사에 관한 서적들은 "불온 서적"으로 분류되어 멸실되거나 일본 왕실 도서관(궁내청 서릉부)으로 반출되었다.

증거를 없앤 범인이 피해자에게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제가 우리 고대사를 증명할 문헌들을 조직적으로 인멸한 상황에서, 실증주의적 잣대만을 들이대며 "문헌이 없으니 역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 통치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논리이다. 국사찾기협의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구전되어 오거나 비전되어 온 사서들(『환단고기』 등)이 비록 후대의 윤색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진실의 파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3.2. 식민사관의 3대 독소: 반도사관, 정체성론, 타율성론

국사찾기협의회가 극복하고자 했던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는 여전히 한국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남아 있다.

반도 사관의 타파: 일제는 한국사의 무대를 한반도 내로 국한시키려 했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고,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한국사가 대륙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늘 갇혀 있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국사찾기협의회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가 만주와 요동, 나아가 중원 대륙을 호령했던 거대 국가였음을 주장하며 우리 역사의 지리적 공간을 복원하려 했다.

타율성론의 극복: 한국 역사는 늘 중국이나 몽골, 일본 등 외세의 간섭에 의해서만 변동했다는 타율성론은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논리였다. 협의회는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연호(건원)를 사용하고, 독창적인 문명(홍산 문화 등과의 연계성)을 일구었음을 강조하며 역사의 주체(Juche)로서의 한민족을 재발견했다.

단군 신화의 역사화: 일제는 단군을 신화적 존재, 즉 허구로 격하시켰다. 곰과 호랑이 이야기는 미개한 토템 신앙의 잔재로 치부되었다. 국사찾기협의회는 단군 조선이 실존했던 국가이며, 47대의 단군이 통치했던 구체적인 왕조사를 제시함으로써 시조를 부정당한 민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다.

3.3. '실증'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얼'의 역사학

강단 사학계는 자신들의 방법론인 '실증 사학'만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 자부한다. 그러나 그 실증 사학의 뿌리는 랑케의 실증 사학을 일본 제국주의에 맞게 변용한 '식민주의 실증 사학'이었다.

일본 학자들은 "사료에 있는 것만 믿는다"는 원칙을 악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한 사료(『삼국사기』 일부, 『일본서기』)만을 정사로 취급하고,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사료들은 "과장이 심하다", "후대의 위작이다"라며 배제했다.

박창암과 임승국은 역사가 단순한 사실(Fact)의 나열이 아니라, 민족의 혼(Spirit/Eol)이 담긴 그릇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정신적 원형을 담고 있는 '진실(Truth)'의 기록이었다. 그들은 "혼이 없는 역사는 죽은 역사"라며, 강단 사학이 뼈대만 남기고 살과 피를 발라낸 건조한 역사 서술로 민족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비판했다.

4. 인신공격을 넘어선 국사찾기협의회의 현대적 재평가

이제 우리는 위서론자들의 인신공격적 프레임을 걷어내고, 국사찾기협의회의 활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4.1.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선구적 방어선

1970~80년대 국사찾기협의회가 만주 강역을 강조했을 때, 강단 사학계는 이를 '영토지상주의'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을 때,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미리 준비해 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재야사학계였다.

협의회는 일찍이 만주가 한민족의 고토임을 역설하고, 요하 문명(홍산 문화)과 고조선의 연관성을 탐구했다. 이는 중국이 "만주 지역의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고 주장할 때, "아니다, 그곳은 동이족(한민족)의 독자적 문명권이었다"라고 반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반면, 한반도 내로 역사를 국한시켰던 강단 사학계는 동북공정 초기에 제대로 된 대응 논리를 개발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그들이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만주 역사를 소홀히 한 결과였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구려마저 중국에 빼앗길 위기에서 속수무책이었을지도 모른다.

4.2. 민족 정체성의 위기와 구심점의 회복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석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과 북은 이념으로 갈라져 있지만, 단군이라는 공통의 시조와 고조선이라는 공통의 역사를 공유한다. 국사찾기협의회가 강조한 '단군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남북이 하나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과 정서적 유대를 제공한다. 박창암 장군이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역사학(단군릉 발굴 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역사가 통일의 열쇠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콘텐츠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지탱할 깊이 있는 정신문화이다. 『환단고기』가 묘사하는 배달국의 찬란한 문명과 홍익인간의 이념은, 한국 문화가 단순히 재미있는 것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품격 있는 문화임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이다.

4.3. 학문의 민주화와 다양성 제고

국사찾기협의회는 학문 권력을 독점한 강단 사학계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학문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어떤 학문이든 비판 세력이 없으면 부패하고 고인 물이 된다. 재야사학의 거센 도전은 강단 사학계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론을 재검토하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다. 최근 학계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으로 넓혀 보거나, 초기 국가 형성 시기를 올려 잡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재야의 비판을 의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의 활동은 일반 시민들이 수동적인 지식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사료를 찾고 역사를 연구하는 '시민 역사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역사를 소수 전문가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 돌려준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결론: 메신저를 죽여도 메시지는 살아남는다

국사찾기협의회 인물들에 대한 인신공격은 그들의 입을 막고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폭력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메신저를 죽인다고 해서 메시지까지 죽일 수는 없다. 박창암, 안호상, 임승국이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 우리는 우리 역사를 남의 눈(식민 사관)으로 봐야 하는가?"

"왜 우리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 조상을 부정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대륙을 호령했던 기상을 잊고 반도에 갇혀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1970년대의 유물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들의 활동에 일부 과장이나 오류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기저에 깔린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 자존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은 결코 훼손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소모적인 인신공격과 낙인찍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대신 국사찾기협의회가 남긴 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실증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고 사실과 진실이 공명하는, 진정으로 자주적이고 융성한 '참된 국사(國史)'를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박창암 장군이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안호상 박사가 낡은 서재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역사 광복'의 길이다.

“백제 그리고 음악” 저자 이종구 한양대음대 명예교수 문화사 강좌 22강 | 국사찾기협의회의 국회 국사 청문회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7ERoPdkUn9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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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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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우 2026-01-15 18:22:44

    이병도,신석호와 그 제자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한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한번 물어보자.
    이병도, 신석호의 학설 중에 어떤 학설이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인가 사례를 제시해 보라.
    저 두 사람에 대한 공격이야말로 전형적인 낙인찍기고 메신저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만들 하라. 사료와 논리로 말을 하라.   삭제

    • 또진짜 종인일까 ㅋㅋ 2026-01-15 11:24:53

      20만권 태웠다고 한 문정창이 증거 들이민 적 있나? 문정창이 읊조리는 사이고 교육시책 본 사람 있나? 어디 썩어빠진 친일 관료가 신분세탁용으로 창작한 책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나. 이러니 안되는 거요 이러니.   삭제

      • 진짜박종인일ㅎ 2026-01-15 11:19:21

        되도 않는 이론 끄집어내서 또 거짓말이다. 저 박종인이 언제 "현실 감각을 잃고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며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경고했냐 ㅎㅎ 날조 조작 뭐 이런 건 그냥 거침없고 양심없구만. 신분세탁 문정창이 쌩구라랑 파시스트 안호상 말 경전으로 삼고 계속 그렇게 살아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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