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종을 바라보는 시선은 유난히도 첨예하게 갈라져 있다. 한쪽에서는 그를 국권을 상실한 무능한 군주로 규정하며 냉혹한 평가를 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도 끝까지 자주독립을 모색한 비극적 군주로 기억한다. 이러한 극단적 인식의 간극은 단지 한 인물에 대한 평가 차이를 넘어,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과 사상 지형이 얼마나 깊이 양극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아래 글은 고종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나라의 국운이 무너져 가는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한 군주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디까지 고민했고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묻기 위한 시도다.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오래된 역사 인식의 한 문장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속수무책의 지경에는
제갈공명의 모계로도 능히 풀 수가 없고
대세가 넘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 뒤에는
한신과 같은 병선도 어찌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은 『통감』 주기(周紀) 19년 ‘신미조(辛未條)’에 실린 문장으로, 훗날 『증산도 도전』(8:98)에 인용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대세가 이미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역사적 조건의 냉혹함이다. 아무리 뛰어난 책략가나 명장이라도 되돌릴 수 없는 국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저항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관점에서 고종과 태극기는 다시 연결된다.
태극기는 저절로 만들어진 깃발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문명사의 축적과 근대사의 결단이 교차한 자리에서 탄생한, 철저히 의식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상징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태극기와 고종 모두 지난 100여 년 동안 왜곡된 역사 인식 속에 함께 가려져 왔다.
태극기의 근원은 단순한 근대 디자인이 아니다. 태극 문양과 네 괘(乾坤坎離)는 팔괘 사상의 핵심 요소로, 팔괘를 정립한 태호복희로 대표되는 동이족 문명권의 우주관에서 비롯된다. 음양의 조화, 천지인 질서, 동서남북의 순환이라는 이 세계관은 최소 5,500년 전부터 동방 문명 속에서 축적되어 온 사유 체계였다. 태극기는 이 장구한 정신 유산이 근대 국가의 상징으로 응결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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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고종, 그리고 왜곡된 시간 |
이 오래된 사상은 1882년, 고종의 결단을 통해 비로소 국기로 완성된다. 당시 일본 발행 『시사신보』(1882년 10월 2일자)에 따르면, 청나라의 외교 실력자 마건충은 조선의 국기를 중국을 본뜬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 문양으로 정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은 황색을 쓰고, 조선은 동방 국가이므로 청색이 적합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중국의 속국으로 오인될 수 있는 상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명한 자주 의식 때문이었다.
고종은 사각형 바탕 위에 태극 문양을 그리고, 네 귀퉁이에 역괘를 배치한 국기를 조선의 국기로 삼을 것을 칙령으로 하교했다. 태극기 제정은 외교 실무자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황제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이 태극기는 같은 해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향하던 배편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용되며, 조선이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시각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이 자주적 상징을 만든 군주 고종은 이후 일제의 의도된, 너무나 치밀한 전략에 의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군주’라는 이미지로 왜곡되며 고착되었다. 이 평가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식민사관의 산물이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황제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시켜야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는 합리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인물사관이 해방 이후에도 상당 부분 계승되며, 오늘날까지 강단사학과 제도권 역사 교육 속에 굳어졌다는 점이다.
실제 고종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에서도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침략이 국제법적으로 불법임을 고발했다. 비록 회의장 입장은 좌절되었지만, 이준 열사의 순국과 이위종의 연설은 유럽 사회에 “한국은 스스로 망한 나라가 아니라 강제로 침탈당한 주권 국가”라는 인식을 남겼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한 것은 청 중심의 책봉 질서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독립 제국임을 선언한 정치적 행위였다. 광무개혁을 통해 토지 조사, 근대 법제 정비, 상공업 진흥, 철도와 전신 도입을 추진한 것 또한 백성을 국가의 주체로 인식한 애민 통치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행보는 고종이 단순히 시대에 떠밀린 군주가 아니라, 대세가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저항 가능한 모든 수단을 모색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 또한 단순한 자연사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식혜를 마신 직후 급서했다는 사실은 당대부터 거센 의혹을 낳았다. 윤치호의 일기와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급성 사망과 기이한 시신 상태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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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고종, 그리고 왜곡된 시간 |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고종을 ‘망국의 암군’이 아닌 ‘저항하는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며, 1919년의 국제 정세에 주목한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를 앞둔 시점에서, 고종이 해외 망명이나 밀사를 통해 일본의 병합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제기할 가능성은 일본에게 중대한 위협이었다. 실제로 고종은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에 끝까지 비준하지 않음으로써, 법적 무효의 근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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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고종, 그리고 왜곡된 시간 |
이처럼 고종은 순응한 군주가 아니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만큼 위험한 존재였다. 그의 죽음 직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독살설과, 장례를 계기로 폭발한 3·1운동은 그가 여전히 민족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태극기와 고종은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다. 태극기는 고종의 자주 선언이었고, 고종은 태극기의 정신을 현실 정치에서 끝까지 붙들려 한 군주였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한류와 함께 태극기의 아름다움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정작 그 국기의 주인인 우리는 그 탄생의 맥락과 정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고종은 굴종의 상징이 아니라,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워진 저항의 상징이다. 태극기를 바로 이해하는 일은 곧 고종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며,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역사적 각성과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이제 역사의 시간은 다시 묻는다. 우리 자신이 그 시간, 그 자리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것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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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와 고종, 그리고 왜곡된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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