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고대사에서 한나라 무제(漢武帝)의 위만조선 침공과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역사가 중국의 식민 지배 체제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하는 강단 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적 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의 이면을 면밀히 분석하면, 한나라의 대규모 군사 행동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음을 시사하는 수많은 정황 증거와 문헌적 균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저항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북부여의 제5세 단군이자 동명왕(東明王)으로 불리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자국의 전쟁이나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을 경우, 상대 진영의 결정적인 승전 요인이나 영웅적인 장수를 기록에서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왜곡하는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고수해 왔다. 고두막한 역시 한무제의 대군을 격파하고 북부여의 주권을 수호한 구국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서에서는 그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되거나 주몽(朱蒙) 등 다른 인물과 혼용되어 그 역사적 위상이 축소되어 왔다.

한무제의 위만조선 침공과 한나라 군대의 군사적 참패
기원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이어진 한나라와 위만조선(번조선) 간의 전쟁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이 전쟁은 위만조선의 멸망과 사군 설치로 종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 과정을 기록한 『사기』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승전국의 기록이라고 보기 힘든 참혹한 패배와 장수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나열되어 있다.
한나라는 누선장군 양복(楊僕)의 수군 7천 명과 좌장군 순체(荀彘)의 육군 5만 명을 투입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우거왕의 군대에 대패하였다. 양복은 군사를 거의 잃고 10여 일을 산속에 숨어 지내야 했으며, 순체는 패수 서군(浿水西軍)을 격파하지 못해 전진이 가로막혔다. 이러한 군사적 무능은 전쟁이 끝난 뒤 한무제가 내린 조치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통상적으로 영토 확장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은 제후로 봉해지거나 막대한 포상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무제의 장수들은 단 한 명도 제후로 봉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령관급 인물들이 기시(棄市, 시체를 거리에 내버리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이는 한나라가 위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거나 사군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키는 데는 처참하게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패의 근저에는 위만조선 멸망 직후 나타난 새로운 저항 세력, 즉 고두막한이 이끄는 북부여 의병의 존재가 있었다.

고두막한의 구국 의병과 한사군 설치 저지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우거를 멸하고 그곳에 사군을 설치하려 사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북부여의 국운이 쇠하고 한나라의 침략이 거세지는 것을 보고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세웠으며, 졸본(卒本)에서 즉위하여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칭하였다.
고두막한의 군세는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군대를 연파하였고, 전쟁 중 흩어졌던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그 기세가 크게 떨쳐졌다. 그는 단순히 방어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는데, 구려하(九黎河, 현 요하)를 건너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요동의 서안평(西安平)까지 진격하였다. 이 지역은 옛 고리국(槀離國)의 영토로, 고구려와 부여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두막한의 이러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에 사군을 실질적으로 설치하지 못하고 요서 지역으로 그 위치를 옮기거나 명목상의 군을 유지하는 데 그쳐야 했던 것이다.
고두막한 실존의 핵심 근거 1: 부여의 시조 동명과 고구려의 시조 주몽
고두막한의 실존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동명왕'이라는 호칭이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과 혼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수많은 기록은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시대에 활동한 다른 인물임을 증언하고 있다. 주몽은 추모(鄒牟) 혹은 중모(中牟)로 불렸으며, 동명은 본래 부여의 건국 영웅을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1세기경 왕충이 저술한 『논형(論衡)』과 『위략(魏略)』, 그리고 이후의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측 사료는 일관되게 동명을 '부여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북이(北夷)의 탁리국(또는 색리국)에서 임신한 여종의 아들로 태어나,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으로 잉태되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남쪽으로 도망치다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엄사수를 건너 부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동명 신화는 훗날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몽 신화로 차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려 시대 이후 『삼국사기』 등이 편찬되며 동명과 주몽이 동일인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연남산 묘지명
고두막한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근거는 1922년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淵男産)의 묘지명이다. 702년에 제작된 이 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옛날에 동명(東明)은 기(氣)를 느끼고 사천(瀍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昔者, 東明感氣踰瀍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이 기록에서 고구려인들은 동명을 '나라를 연(啓國)' 인물로, 주몽을 '도읍을 연(開都)' 인물로 명확히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는 동명이 부여의 국가적 기반을 닦은 고두막한을 의미하며, 주몽은 그 전통을 계승하여 고구려라는 새로운 국가 형태를 완성한 인물임을 시사한다. 만약 두 인물이 동일인물이었다면 굳이 묘지명에서 이처럼 대구(對句)를 이루며 행적을 나누어 기록할 이유가 없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와 모두루 묘지명에서 시조를 '추모성왕'으로만 기록할 뿐 '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점은 고구려 중기까지만 해도 두 인물이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방증한다.
고두막한 실존의 핵심 근거 2: 중국 사서 속의 '막래(莫來)'와 연대적 일치성
위서와 북사가 기록한 주몽의 후예 '막래'
중국 측 정사인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과 『북사(北史)』에는 『삼국사기』의 왕계와는 배치되는 독특한 기록이 존재한다. 주몽 사후 여달(閭達, 혹은 여해)과 여율(如栗)을 거쳐 막래(莫來)가 즉위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이들 사서는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마침내 복속시켰다"고 기록하며, 그 시기를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할 무렵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은 오랫동안 한국 사학계의 미스터리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막래(莫來)가 대무신왕(무휼)과 음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했으나, 연대기적인 불일치 때문에 의문을 가졌다. 만약 막래가 주몽의 손자나 증손자라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37년보다 최소한 100년 이상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이름 중 '막(莫)' 자와 막래(莫來)의 '막(莫)' 자가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북부여기』에 기록된 고두막한의 활동 시기(기원전 108년~)는 『위서』와 『북사』가 기록한 막래의 활동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또한 고두막한이 졸본에서 일어나 기존의 북부여(해부루 세력)를 압박하여 복속시키고 가섭원으로 밀어낸 사건은, 중국 사서에서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여 통복(統屬)시켰다"는 내용과 그 구조가 완벽히 일치한다.
중국 사가들은 한나라에 패배를 안겨준 강력한 적대 지도자였던 고두막한의 이름을 '막래'라는 음차 형태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부여의 역사를 주몽 중심의 고구려 역사로 통합하거나 왜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막래'에 관한 기록은 고두막한이라는 인물이 중국 측 문헌에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는 실존의 파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두막한 실존의 핵심 근거 3: 해부루와의 권력 교체와 '천제지자' 선포
신화적 장치 이면의 역사적 실체
『삼국유사』 북부여조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국상 아란불의 꿈에 나타난 '천제'의 명령에 따라 도읍을 가섭원(동부여)으로 옮겼다는 기이한 기록이 등장한다. 천제는 아란불에게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서사는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통해 명확한 역사적 사건으로 복원된다. 기원전 87년(갑오 34년), 동명국 왕 고두막한은 해부루에게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최후통첩을 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我是天帝子)이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당시 고두막한은 한나라 군대를 몰아낸 전쟁 영웅으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위협을 견디지 못한 해부루는 결국 주권을 내주고 가섭원으로 망명하여 동부여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기존 사서에서 '천제'나 '천신'으로 신비화된 존재는 실제 역사 속에서 한나라의 침략을 저지하고 북부여의 정통성을 장악한 고두막한이라는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천제지자'라 선포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두막한 실존의 핵심 근거 4: 두막루(豆莫婁)국의 존재와 명칭의 계승
북부여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 두막루
5세기부터 8세기까지 만주 북부 송화강 일대에는 '두막루'라는 국가가 존재했다. 『위서』 권100 「물길전」과 『신당서』 「유귀전」에 따르면, 두막루국은 스스로를 '옛 북부여의 후예(自言北夫餘之裔)'라고 칭했으며, 고구려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유민들이 나하(那河)를 건너가 그곳에 거주하며 세운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국명 '두막루(豆莫婁)'가 고두막한의 이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북부여기』는 고두막한을 일명 '두막루(豆莫婁)'라고도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두막한이 세운 졸본부여 혹은 그가 계승한 북부여의 정통성이 멸망 이후에도 그 후예들에 의해 '두막루'라는 국호로 보존된 것이다.
두막루국은 주변의 말갈(물길)이나 실위와는 다른 고유한 문화를 유지했다.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두막루는 농경에 종사하며 오곡을 길렀고, 풍속이 부여와 동일하여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6축 관직)을 사용했다. 특히 '두막루'라는 명칭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에 따르면, '두(豆)'는 머리나 으뜸을 뜻하는 접두어이며, '막루'는 마루(우두머리 혹은 고을)를 의미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최고 통치자임을 나타내는 호칭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후대 국가의 존재와 그들이 표방한 북부여 계승 의식은 고두막한이라는 인물이 그들의 역사적 기억 속에 실존하는 시조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두막한 실존의 핵심 근거 5: 지리적 재비정과 서압록(西鴨錄)의 실체
두 개의 압록강: 요하(遼河)와 현재의 압록강
고두막한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리적 키워드는 '서압록(西鴨錄)'이다. 『삼성기』 상권은 고두막한을 '서압록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한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했다고 전한다.
최근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연구는 고대 문헌 속의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뿐만 아니라 요하(遼河)를 가리키기도 했음을 밝혀냈다. 한자 표기에 따라 물수변을 쓰는 압록강(鴨淥江)은 현재의 요하를, 실사변을 쓰는 압록강(鴨綠江)은 현재의 압록강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고두막한이 '서압록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현재의 압록강 하구가 아닌,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요하 서쪽 지역 출신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한나라와 위만 정권의 전쟁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즉각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지리적 배경을 완벽히 설명해 준다. 또한 고두막한이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요동의 서안평까지 진격했다는 기록 역시 그가 요하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지리적 타당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역사지리학적 연구 성과는 고두막한의 행적을 허구가 아닌 구체적인 실제 지표 위에서 복원할 수 있게 한다.
패자의 영웅을 지우는 중국의 서술 방식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국의 군사적 패배를 기록할 때 매우 정교한 은폐 기법을 사용해 왔다. 한무제의 위만조선 전쟁에서 사군 설치라는 명분은 사서에 남겼으나, 실제 그 땅을 지배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인 고두막한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만약 고두막한이라는 인물을 정사에 기록했다면, 한나라 황제의 위엄이 손상됨은 물론 한사군 설치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당태종을 위기에 빠뜨린 양만춘 장군을 중국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고두막한은 한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요동 서안평까지 영토를 회복한 인물로서, 한무제의 동방 확장 정책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인물이다. 중국 사가들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그를 '막래'와 같은 변형된 인물로 격하하거나, 아예 기록에서 배제함으로써 역사의 공백을 만든 것이다.
주몽과 동명의 혼용을 통한 역사적 단절
중국 사서가 동명(고두막한)과 주몽을 의도적으로 혼동하여 기록한 것 또한 북부여의 역사를 지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약 200년의 북부여 역사는 고두막한의 치세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가 동명을 주몽과 동일시함으로써 주몽 이전의 북부여 항쟁사는 신화의 영역으로 밀려나거나 삭제되었다. 이는 현대의 동북공정이 고구려와 부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하려는 논리와도 맞닿아 있는 중대한 역사적 왜곡의 시발점이다.

고두막한의 역사적 복원과 우리 고대사의 자존감
북부여의 제5세 단군 고두막한은 한나라의 무력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사군 설치를 실질적으로 저지하고, 북부여의 주권을 수호한 실존 영웅이다. 그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다각적인 근거를 통해 입증된다.
전쟁 결과의 역설: 한나라 사령관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제후 책봉의 부재는 고두막한과 같은 강력한 저항군의 승리를 반증한다.
독자적 왕계 의식: 연남산 묘지명과 광개토대왕비 등 고구려 당대의 금석문은 동명과 주몽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중국 기록의 잔영: 『위서』와 『북사』의 '막래' 기록은 고두막한의 이름과 연대, 행적(부여 정벌)이 중국 사서에 변형되어 반영된 결과이다.
후대 국가의 증언: 8세기까지 만주를 호령한 두막루국은 고두막한의 이름을 국명으로 계승하며 자신들이 북부여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지리학적 부합: 서압록(요하)과 서안평을 중심으로 한 고두막한의 활동 기록은 고조선-부여의 실제 강역 및 한나라와의 접경 지대 상황과 완벽히 일치한다.
고두막한의 실존을 인정하고 그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한 명의 잊혀진 장수를 찾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중화주의 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훼손된 북부여사 200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며, 우리 고대사가 외부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역사가 아닌 외세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 주권을 지켜낸 능동적인 역사였음을 증명하는 길이다. 고두막한이라는 실존의 근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진실을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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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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