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 힐링 역사 속 오늘
【역사 속 오늘】 2월 3일, 침묵 위에 쌓인 시간 그리고 세계사
2월 3일, 침묵 위에 쌓인 시간 그리고 세계사

조병화 시인의 시 「겨울」은 말한다.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고, 그 흔적들로 묵묵히 봄을 준비한다고. 달력 속 하루로는 짧지만, 2월 3일이라는 날짜는 그렇게 인간의 노동과 침묵, 제도와 언어, 비극과 전환이 켜켜이 쌓여온 시간이었다.

음력으로 입춘이나 대보름을 하루 앞둔 이날은 예부터 ‘아홉차리’라 불렸다. 아이는 천자문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나무 아홉 짐을 하며, 노인은 새끼를 아홉 발 꼬았다. 나물은 아홉 바구니를 캐고, 빨래는 아홉 가지를 하며, 길쌈 또한 아홉 바디를 삼았다. 반복되는 노동 속에 성실이 곧 삶을 일으키는 힘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같은 날은 절분(節分)이기도 해, 밤이 되면 ‘해넘이’라 부르며 집안과 문간에 콩을 뿌려 액운을 쫓고 새해의 문턱을 맞았다.

이날은 또한 ‘한국수어의 날’이다. 2016년 2월 3일, 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농인의 공용어로 인정받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다. 언어가 권리이자 존엄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제도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를 기념해 2021년 공식 기념일로 지정되며, 소통의 장벽을 허무는 사회적 약속이 다시 한 번 강조됐다.

산업과 제도의 변곡점도 이 날짜에 겹친다. 1962년 울산공업단지 기공은 한국 산업화의 물적 토대를 놓았고, 1997년 아리랑TV 개국은 세계를 향한 공공외교의 창을 열었다. 2001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결성은 공직사회 내부의 권리 의식과 조직화를 상징했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은 가족과 성평등을 둘러싼 법질서의 방향 전환을 알렸고,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는 이후 수년간 한국 사회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촉발했다.

그러나 2월 3일은 비극의 기억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 1980년 국보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 도굴 사건은 문화유산 보호의 경각심을 남겼고, 1987년 영동산간의 기록적 폭설은 자연 앞에서 취약한 사회 인프라의 민낯을 드러냈다. 1989년 KAL기 폭파 사건의 가해자 기소와 이후 사형 확정, 그리고 특별사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단과 냉전의 상흔이 개인과 국가에 남긴 윤리적 질문을 던졌다. 2017년 최순실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 시도 실패는 권력과 법치의 긴장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세계사에서도 이날은 굵직한 전환점들로 채워져 있다. 1468년 금속활자의 완성으로 지식의 확산을 가속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별세, 1924년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의 사망은 사상의 씨앗이 제도와 역사로 번져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야마구치현 조세이 해저탄광 수몰 사고는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 다수를 포함한 수백 명의 희생을 낳았고, 이 비극은 2026년 한·일 정상 간 유해 감정 합의로 뒤늦은 책임의 문을 열었다. 1950년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의 정식 독립, 1966년 소련 루나 9호의 달 표면 최초 연착륙, 1972년 삿포로 겨울올림픽의 개막은 탈식민과 과학, 스포츠가 교차한 시대의 단면이다. 2006년 홍해에서 발생한 대형 여객선 침몰과 2014년 재닛 옐런의 미 연준 의장 취임은 한날에 공존한 참사와 유리천장 돌파의 대비를 보여준다.

2월 3일은 이렇게 조용히 반복되는 노동의 미덕과 언어의 권리, 산업의 도약과 제도의 성찰, 그리고 세계사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품어왔다. 눈이 덮인 자리에서 봄을 준비하듯, 이 하루는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며 다음 계절로 나아가게 하는 시간의 매듭으로 남아 있다.
 

김가연 기자  k-gayeo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가연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