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국 기사의 연대적 모순과 문헌적 배경
《일본서기(日本書紀)》 권5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BCE 33년) 조와 권6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BCE 28년) 조에 등장하는 임나(任那) 관련 기사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논쟁적인 텍스트이다. 이 기록은 '임나'라는 지명이 일본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점이자, 가야 연맹체와 일본 열도의 초기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기록된 연대인 기원전 1세기는 고고학적으로 가야나 임나라는 광역 정치체가 한반도 남부에 형성되기 훨씬 이전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연대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①숭신천황 65년의 임나 사절 내빙 기사
숭신천황 65년(BCE 33년) 조에는 "임나인 소나갈길지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사는 임나의 위치를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임나의 위치 비정에 대한 세 가지 조건이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서기》가 묘사한 임나의 지리적 환경은 한반도 내륙의 가야보다는 섬인 대마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북조해(北阻海)'라는 표현은 임나를 한반도 남부로 고착시키려는 학자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대목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편찬자의 실수"라거나 "북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라는 식의 자의적 오역이 횡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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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수인천황 2년의 소나갈길지 귀국과 비단 탈취 사건
수인천황 2년(BCE 28년), 소나갈길지는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고, 천황은 임나왕에게 하사할 붉은 비단(赤絹) 100필을 그에게 준다. 그러나 소나갈길지는 귀국 도중 신라 사람들에게 비단을 약탈당하게 되는데, 《일본서기》는 이 사건을 통해 "이후 신라와 임나 사이에 원한이 시작되었다"고 서술한다. 이 서사는 전형적인 '기원 설화(Etiological Myth)'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부가라(意富加羅)와 도노아아라사등 전승의 정체성
수인천황 2년 조에는 소나갈길지 기사 뒤에 '일설'이라는 형태로 또 다른 도래 설화가 삽입되어 있다. 이마에 뿔(角)이 난 사람이 배를 타고 월국(越國)의 사반포(笥飯浦)에 도착했는데, 그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며 '의부가라(意富加羅)' 국왕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일본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귀화하려 했으나, 도중에 대가야나 신라 등지의 복잡한 상황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쟁점은 도노아아라사등이 출신지로 밝힌 '의부가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의부(意富)'의 음독과 '대가야' 조작
식민사학자들과 일부 국내 학계는 '의부(意富)'가 고대 일본어에서 '오호(Oho)'로 읽힌다는 점에 주목했다. '오호'는 '크다(大)'는 뜻을 가진 고유어이므로, '의부가라'는 곧 '오호가라', 즉 '대가야(大伽倻)'를 의미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논리적 단계: 의부(意富) → 오오(おお) → 크다(大) → 의부가라 = 대가야

이러한 해석은 지극히 단편적인 언어학적 추론에 기반하고 있다. 고대 일본어에서 '오호'라는 발음을 가진 한자 표기는 意富 외에도 多, 大, 於保 등 다양하며, 이것이 반드시 '대가야'라는 고유 명사와 직접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더욱이 현대 일본어 발음으로 意富加羅는 '이토미가라'에 가깝게 들릴 수 있으나, 고대 음독을 따르더라도 이를 '대가야'로 확정 짓는 것은 문맥을 무시한 견강부회에 가깝다.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 계승자들은 이 가설을 수용하여 "임나 = 의부가라 = 대가야"라는 공식을 정립했고, 이는 가야사의 주도권이 대가야에 있었다는 전제 아래 한반도 남부 경영론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신찬성씨록》에 나타난 오오(意富) 씨족
815년에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 일람서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의부(意富)'라는 표기의 성격과 유래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이 책에는 '오오(意富/多)'라는 성씨를 사용하는 다수의 씨족이 등재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의부'는 주로 황별 씨족, 즉 천황가에서 분리된 고귀한 혈통의 성씨로 사용되었다. 특히 신무천황의 자손인 '다씨(多氏)'가 意富라는 표기를 사용했다는 점은 이 명칭이 단순히 '크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고대 일본의 지배 계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고유한 계보적 상징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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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인 성씨로서의 의부(意富)
제번(諸蕃) 씨족 중에도 意富를 사용하는 가문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다. 이는 '의부가라'라는 명칭이 대가야라는 국가 전체를 지칭하기보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정착한 특정 가야계 집단이나 그들이 세운 분국(分國)의 명칭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응신천황이 백제 비류계의 성씨인 '진(眞)'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이나, 소가(蘇我) 씨의 시조가 백제의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주장처럼, 고대 일본의 성씨 형성은 한반도 도래 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의부가라'는 대가야가 아니라, 일본 내에서 '오오(意富)'라는 유력 성씨를 형성하게 된 가야계 세력의 근거지를 뜻하는 용어로 보아야 타당하다.

하야시 다이스케 《조선사》와 임나일본부설의 성립
임나를 대가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한 인물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이다. 그는 1892년 저술한 《조선사》에서 "대가야는 우리 송신(숭신천황)의 때에 소나갈질을 보내 장군을 청했다"며, 가야의 요청으로 왜의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했다는 논리를 폈다.
하야시는 《일본서기》의 설화적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임나가 '북조해'에 위치한다는 명백한 지리적 정보를 무시하고, 가야 맹주인 대가야(고령)를 임나로 비정함으로써 지배의 효율성을 강조하려 했다. 처음에는 고령 대가야를 임나라고 하다가, 고령이 너무 내륙에 있어 지리적으로 맞지 않자 김해 금관가야를 대가야라고 주장하거나, 안라(함안) 등지로 임나의 중심지를 옮겨 다니는 등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국내 학계의 식민사학 논리 계승 문제
해방 이후에도 이병도 등 주류 사학자들은 하야시 다이스케와 스에마츠 야스카즈가 정립한 지명 비정 체계를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했다. 그들은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구는 없었지만, 임나가 가야를 지칭하는 것은 맞다"는 절충안을 내놓았으나, 이는 결국 "가야 = 임나"라는 식민사학의 프레임 속에 가야사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의부가라'를 '오오가라'로 읽고 이를 대가야로 비정하는 논리를 검증 없이 수용함으로써, 가야 연맹의 역사를 일본 열도와 분리된 한반도 내륙의 역사로만 국한해 보게 만들었다. 이는 임나 기사가 가진 일본 열도 내 분국(分國) 건설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게 한 것이다.
'북조해(北阻海)'와 대마도 비정의 타당성
《일본서기》 숭신 65년 조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는 기록은 임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이다. 한반도 남부 가야의 북쪽은 백제나 신라와 맞닿은 육지인 반면, 대마도의 북쪽은 대한해협이라는 망망대해이다.
또한 '축자(규슈)에서 2,000여 리'라는 거리 규정은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나타난 거리 계산법을 적용할 때 정확히 대마도에 해당한다. 이병선, 문정창 등 민족사학자들은 이러한 지리적 일치성을 근거로 "임나는 대마도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임나대마도설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는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던 지역"이라며, 이후 대마도 전체가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임나'가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야인들이 일찍부터 대마도에 진출하여 그곳을 본국 가야의 영향권 아래 두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초기 임나 기사는 한반도 가야 본국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대마도에 건설된 가야계 분국(分國)과 왜 왕실 사이의 교섭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의부가라' 역시 대마도 내에 존재했던 유력한 가야계 정치체의 명칭이었을 것이며, 이것이 후대에 일본 내에서 '오오(意富)'라는 유력 씨족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임나 정체성 회복을 위한 과제
《일본서기》 숭신·수인천황조의 임나 기사는 한일 관계의 태동기를 보여주는 사료이지만, 그동안 식민사학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어 왔다. '의부가라'를 '대가야'로 조작하기 위해 "의부 = 오오 = 대(大)"라는 무리한 언어학적 가설을 세우고, '북조해'라는 명확한 지리적 지표를 무시한 결과, 가야사는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적 실체의 그림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언어학적 허구: '의부(意富)'는 고대 일본 지배 계층의 계보와 관련된 특수 명사이며, 이를 단순히 '크다'는 뜻으로 풀이해 대가야와 연결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지리적 실체: 《일본서기》의 기록을 직역하면 임나의 위치는 한반도 내륙이 아닌, 북쪽이 바다로 막힌 대마도로 귀결된다.
식민사관의 계승: 하야시 다이스케가 정립한 '임나 = 대가야' 설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현대 학계의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가 일본에 지배당했던 흔적이 아니라, 가야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마도와 일본 열도 곳곳에 세웠던 분국들의 역사적 실체이다. '의부가라'를 대가야로 등치시키는 도식에서 벗어나, 고대 한일 교류의 다층적 구조와 도래 씨족들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때 비로소 왜곡된 가야사의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학계는 문헌 기록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더불어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 열도 내의 가야계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병행해야 할 것이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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