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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없는 3·1운동: 결사대로 싸운 삭주삭주삼일록(朔州三一錄)에 기록된 1919년 삭주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과정

평안북도 삭주 지역 독립운동
1919년 기미년의 3.1운동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하여 일어난 거국적인 독립 투쟁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평안북도 삭주군은 지리적 특수성과 종교적 네트워크가 결합하여 매우 치열하고 조직적인 저항을 보여준 지역으로 손꼽힌다. 삭주는 북쪽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 관甸縣(관전현) 및 寬甸縣(관전현)과 마주 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창성군, 남쪽으로는 구성군 및 천마산 일대와 연결되는 산악 지대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은 초기 만세 시위가 이후 만주를 거점으로 한 무장 독립 전쟁으로 전이되는 데 결정적인 환경을 제공하였다.   

삭주 지역의 민족의식은 근대 교육의 보급과 종교 단체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배양되었다. 특히 삭주농흥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은 청년들에게 민족 자강의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하부 조직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승훈은 서북 지방의 산악 지대 주민들을 거사에 동참시키기 위해 치밀한 사전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주군 월화면 교회의 송문정 목사를 삭주로 급파하여 현지의 종교 지도자들과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삭주 시위가 단순한 감정적 폭발이 아닌 고도로 기획된 조직적 항쟁이었음을 시사한다.   

삭주삼일록(朔州三一錄)의 문헌적 가치
삭주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주는 기록물 중 하나인 『삭주삼일록』은 당시의 처절했던 투쟁 현장을 객관적인 수치와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삭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5일 발화하여 5월까지 약 두 달여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지속성과 참여 규모 면에서 평안북도 내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 기록이 보여주는 연인원 3만 5천 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삭주군의 전체 인구 규모를 고려할 때, 성인 남녀 대다수가 최소 한 번 이상은 시위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17회에 걸친 시위 횟수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무력 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갔던 지역 주민들의 강인한 독립 의지를 방증하는 지표이다.   

3월 초순: 삭주읍내의 초기 봉기와 종교 연대의 결실
삭주의 첫 만세 함성은 1919년 3월 5일 오후 2시경 삭주읍내에서 울려 퍼졌다. 이 봉기는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긴밀한 연대 속에서 준비되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과 유여대 목사의 지시를 받은 송문정 목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천도교 측에서는 의주의 최석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장대길 등이 교인들을 규합하였다. 장대길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복제하여 각 면에 신속히 전달함으로써 광범위한 동원 체계를 가동하였다.   

3월 5일 당일, 읍내에 집결한 3,000여 명의 군중은 일본 헌병대 청사를 포위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에 대해 즉각적인 발포로 대응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장에서 4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체포되는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유혈 진압은 주민들을 위축시키기보다 오히려 항일 열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흘 뒤인 3월 9일에도 기독교인 50여 명이 다시 읍내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며 투쟁의 불씨를 이어갔다.   

3월 말에서 4월 초: 외남면 대관리(大管理) 시위의 격상
3월 중순 이후 삭주 지역의 시위는 읍내를 넘어 각 면 단위의 농촌 지역으로 확산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외남면 대관리는 가장 격렬한 투쟁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3월 31일부터 시작된 대관리 시위는 수천 명의 군중이 며칠간 지속해서 집결하는 대규모 봉기의 성격을 띠었다. 시위대는 한국인을 살상한 전력이 있는 일본 헌병 분견소를 포위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일제의 통치 기구에 대해 직접적인 물리적 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대관리의 항쟁은 단순한 소요 사태를 넘어 지역 사회 전체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수준에 이르렀다. 4월 1일부터 3일간 대관리 일대의 보통학교 2개소와 소학교 1개소가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는데, 이는 학생과 교사들이 시위의 핵심 동력으로 참여했거나 일제의 교육 행정을 거부하는 비협조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4월 5일 삭주 읍내에 주둔하던 헌병 5명을 대관리로 추가 증파하여 강압적인 진압 준비에 착수하였다.   

4월 6일 대관리 결사대(敢死隊) 조직과 최후의 항전
『삭주삼일록』과 관련 사료들을 종합할 때, 삭주 3.1운동의 정점은 1919년 4월 6일에 발생한 대관리 시위였다.  이날 대관리 장터와 주변 일대에는 약 6,000명에서 7,000명에 이르는 방대한 인파가 집결하였다.   

이날 시위의 가장 독보적인 특징은 약 200명 규모로 조직된 결사대(敢死隊)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시위 참가자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의 총칼에 맞서 시위대를 보호하며 선두에서 돌격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적인 무력 저항 집단이었다. 결사대는 일본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군은 조준 사격과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였다.   

4월 6일의 참극 이후 삭주 전역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다. 일제는 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으며, 4월 11일 새벽에는 시위의 근거지로 의심받던 삭주 읍내 기독교 교회당을 고의로 방화하여 전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으로, 독립을 갈망하는 민중의 기세를 꺾기 위한 야만적인 보복 행위였다.   

삭주 3.1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
삭주 지역의 항쟁이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가진 지도자들과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의 핵심 간부로 성장하였다.

송문정(宋文正) 목사와 종교계 지도층
송문정 목사는 의주와 삭주를 잇는 독립운동의 가교였다. 그는 이승훈의 특명을 받고 삭주에 잠입하여 기독교 조직을 시위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시위가 발발한 후에도 영적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여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천도교 측의 장대길은 독립선언서의 보급과 농촌 지역 포덕망을 활용한 인원 동원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연(金泰淵)과 결사대장으로서의 기개
삭주 농흥학교 출신인 김태연은 향리에서 만세 운동을 직접 주도하며 청년들을 결집하였다. 그는 현장에서의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1919년 7월 만주로 망명하였고, 이후 대한통의부 국내 파견 결사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고도의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그의 활동은 삭주의 결사대 정신이 어떻게 전문적인 무장 독립군으로 계승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태연(金泰淵)·박응백(朴應伯)·이덕수(李德秀)·최석순(崔碩淳)은 무장독립단에 가담해 열렬하게 투쟁하다가 순국한 대표적인 의사이다." ('삭주군' 검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삭주군'을 검색하면 대표적인 삭주군 출신 독립운동가로 김태연이 가장 먼저 나온다. 김태연과 함께 열거된 박응백,이덕수은 모두 단학회원이다. 이덕수는 4대 회장이며 박응백은 위에서 보듯 단학회 교화사 직책을 맡았다. 

최석준(崔錫俊)과 최석순(崔錫淳) 형제
삭주면 대대동 출신의 최석준은 3.1운동 당시 고향에서 맹활약한 후, 형 최석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군 및 독립군 부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형제는 압록강 연안의 지리를 숙지하고 있었기에 국내 진공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최시흥(崔時興)과 천마산대(天摩山隊)의 발흥
삭주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최시흥 장군은 3.1운동 직후 삭주와 의주 경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하여 '천마산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3.1운동의 비폭력 노선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일제 무력에 대항하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 조직을 운영하며 평안북도 북부 일대의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오봉록 지사는 이러한 최시흥의 활동과 천마산대 대원 66명의 명단을 기록하여 훗날 『삭주군지』에 남김으로써 역사의 유실을 막았다.   

결사대의 조직 메커니즘과 독립운동사적 의의
대관리 시위에서 나타난 '결사대'의 조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인 3.1운동이 독립 선언과 평화 시위에 주력했다면, 삭주의 결사대는 일제의 무력 탄압을 예견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던 '방어적 무장 시위'의 성격을 띤다.   

이들은 시위대 내에서 별도의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시위대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육탄 방어와 돌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결사대 조직의 경험은 시위 참가자들이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부대에 입대했을 때 신속하게 전투 요원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심리적, 조직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정 방침 중 하나였던 '감사대(敢死隊) 조직 및 국내 활동'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결론: 삭주삼일록에 투영된 삭주 민중의 불굴의 기개
평안북도 삭주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5일부터 4월 6일 대관리의 거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고조되며 조직화된 민중 항쟁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히 4월 6일 대관리 시위는 7,000여 명의 민중과 200명의 결사대가 일제의 총칼 앞에 죽음을 무릅쓰고 맞섰던 삭주 독립운동의 정점이자 찬란한 기록이다.   

『삭주삼일록』은 이러한 현장의 긴박함과 희생을 숫자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송문정, 김태연, 최시흥과 같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결사대로 산화해간 수많은 민초의 헌신을 기억할 수 있다. 삭주의 항쟁은 일제의 잔혹한 보복인 교회당 방화와 대량 살상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무장 투쟁으로 번져나가 조국 광복의 굳건한 기초가 되었다. 삭주 3.1운동은 비폭력 평화 시위가 어떻게 조직적인 저항으로 진화하며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했는지를 증명하는 한국 근대사의 소중한 자산이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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