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 않고 살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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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 만나면 소통한다...소통의 두 의미
광의의 소통은 ‘흐름’이고, 협의의 소통은 ‘흐르게 함’이다. 광의의 소통은 자연물의 오고감과 흐름까지를 포함하고, 협의의 소통은 사람이 물질이나 정신을 흐르게 함이다. 협의의 소통은 더 좁혀져 사람이 ‘정신적 메시지를 흐르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광의의 소통은 행위가 없는 ‘가고 옴’이고, 협의의 소통은 행위가 있는 ‘보내고 받음’일 것이다. 이 책에서 소통은 의사소통의 상위개념이지만, 좁은 의미로도 쓰인다. 그리고 더 좁혀서 자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만을 지시한다. 포괄적인 소통의 개념으로, 자연과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 삶의 모습을 더 물을 수 있고 더 드러낼 수 있다. 협의의 소통개념이라도 광의의 소통개념과 이어지는 맥락에 놓일 때, 그것이 물어내고 드러내고 풀어내는 힘은 크게 달라진다.
하나의 소통이 갈등과 긴장을 안고 있어 불통으로 보일지라도, 소통은 소통이다. 아무리 일방적인 통고라 하여도, 그 메시지 중 약간은 들릴 것이며, 수용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일방적인 통고라도 초래하는 변화는 지대할 수 있다.
저수지 둑에 난 틈새의 미세한 흐름도 거대한 물난리를 수반할 수 있다. 만남 없는 소통은 없으며, 소통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침묵의 만남이나 싸우는 만남도 역시 소통의 한 방식이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소통하고, 자연물과 만나면서 소통한다. 아니, 죽기 위해서, 심지어 죽이기 위해서조차 그런다. 만나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모든 종류의 행위를 의사소통으로 이해하는 오스트리아의 소통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사회학자, 철학자인 바츨라빅(Watzlavick, 1921~2007)은 ‘사람은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소통의 있음과 없음보다 소통의 모습과 크기가 문제라 할 것이다.
함께 나누기
Mit-teilen(밋-타일렌: 전달하다)의 뜻이 있는 communication엔 함께(mit)와 나눔(teilen)의 의미가 같이 들어 있다. 따라서 communication엔 ‘함께 나눔’, ‘나누며 함께 함’의 뜻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달하여 상대와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나(A)의 것이 메시지(i)로서 나를 떠나 너(B)의 것이 되었지만 나에게도 남아 있다. 나의 것(Ai1)이 너에게로 갔지만 가지 않은 셈이다.
떡을 나누었을 때 떡의 반은 너에게로 갔으며, 간 것은 남은 반과는 다른 것이며, 떠난 자리는 비어있게 된다. 그러나 생각을 말로 나누었을 때는, 생각의 반이 아니라 전체가 너에게로 갔는데도 전체는 나에게도 남아 있다. 보냈는데 남아있으니 좀 신기하다. 물질과 정신의 차이인가보다.
너가 나의 것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때, 너의 지식(Bi2)은 너의 원 지식(Bi1)에 나의 지식(Ai1)이 하나의 방식으로 더해진 것(Bi1+Ai2)이다. 비록 Ai1에서 Ai2로 변질될 수밖에 없지만, 나의 것(Ai1)은 이제 나에게도 너에게도 함께 존재한다.
나의 것은 이동하여 ‘나뉘었지만 함께’의 것이 되었다. 아니, ‘나뉘었으니 함께’의 것이 되었다. 나에게도 남아 있으니 함께이고, 너에게도 가 있으니 나뉨이다.
하나와 둘의 관계이지만, 둘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씩 함께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를 둘로 만들어 하나씩 함께 나눈 것이다. 어찌 보면, 하나이면서 둘이다. 하나는 나뉘지만, 나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에게 하나는 계속 온전한 하나일 수 있다. 이는 1 나누기 2가 2분의 1이 아니라 2가 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곱하기가 된 나누기’인 셈이다.
하지만, 변한 너의 것(Bi2)이 나에게 온다면, 나대신 너이고 Ai1대신 Bi2이지만, 그 방식은 내가 너에게 보낼 때와 같다.
그리하여 나도 너의 생각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는 너의 것(Bi2)이 다시 나에게로 들어오면서, 나의 것(Ai1)은 너의 것(Bi2)과 만난다. 나의 것(Ai3)은 이제 Ai1+Bi3로 된다. 나의 것이 다시 너의 것과 만나면, 너의 것(Bi4)은 Bi2+Ai4로 된다.
‘함께 나누는’ 소통에서 두 측면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바뀜’이다. 흐름 속에 판단과 지식, 메시지의 장소가 바뀐다. 그 내용도 가는 도중에 바뀌기 쉽고, 받아지는 때에 다시 바뀐다. 아니, 떠나는 순간에도 발음이 틀리거나 착각이 생겨, 혹은 시간에 쫓기는 이유 등으로 생각 그대로가 떠날 수 없을 수 있다.
문제를 정리해 보자. 어떤 것에 대한 나의 판단과 너의 판단이 있다. 그리고 이 두 판단은 소통 속에 서로 만난다.
나의 판단: Ai1
너의 판단: Bi1
나의 판단을 접한 너의 판단: Bi2=Bi1+Ai2
나의 판단을 접한 너의 판단을 접한 나의 판단: Ai3=Ai1+Bi3
나의 판단을 접한 너의 판단을 접한 나의 판단을 접한 너의 판단: Bi4=Bi2+Ai4
나의 판단 Ai1은 너에게로 가서는 Ai2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것이 더 붙거나,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포함한다. 말로 표현되기 전의 나의 생각이 Ai0이라면, Ai0은 말로 표현되면서, 채널을 지나면서, 너의 귀로 들어가면서, 해석되면서 바뀐다.
이런 단계들 속에 나의 생각 Ai0을 그대로 전달하고 남의 생각 Bi0을 그대로 전달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아니,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여기에 Ai0이든 Bi0든, 이들이 지시하는 사물을 적확하게 형성할 수 없다면, 문제는 더 꼬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소통하며 살고 있다. 100 퍼센트 적확하게 형성하지도, 표현하지도, 전달하지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지라라도, 우리는 나누면서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더 살아갈 것이다. 이유 중 하나는 그때그때의 삶의 맥락이 소통을 많이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섯 살 배기 아들과 독일에서 귀국하는 중 모스크바 공항에 두세 시간 머물 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은 동구의 한 여자 아이와 처음부터 각자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고 들으면서 한 시간여 동안 뛰어다니며 놀았다. 텍스트로만이라면 서로 한 단어도 주고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신기함은 놀라운 컨-텍스트, 맥락의 힘이었다. 우리가 작은 소통크기를 말할 때, 어떻게 완전하게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할 것이다. 일단은, 함께 살아가는 데에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소통크기가 우리가 찾아갈 대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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