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 힐링 역사 속 오늘
【역사 속 오늘】 2월 12일, 행주에서 게놈까지
2월 12일, 행주에서 게놈까지

2026년 2월 12일(음력 12월 25일). 겨울 끝자락에 선 이 날은 전쟁과 개혁, 과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 내면의 도덕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에 의지하지 말아라. 그날그날이 일 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문장은, 굵직한 사건들이 겹겹이 쌓인 2월 12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조선 선조 26년이던 1593년 2월 12일,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흔든 행주산성 대첩이 벌어졌다. 권율 도원수가 이끈 1만여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3만 왜군을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훈련도 충분치 않았던 병사들과 백성들은 산성에 올라 끝까지 항전했고, 여성들은 치마에 돌을 날라 전투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이름마저 ‘행주(幸州)’라 불리게 된 이 산성은 위기 속에서 공동체가 하나로 뭉칠 때 어떤 힘이 발휘되는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근대 전환기의 제도 개혁도 이날 이뤄졌다. 1901년 대한제국은 금본위제에 기초한 신식화폐조례를 공포하며 국제 통화 질서에 발맞추려 했다. 격동의 제국 말기, 화폐제도 개편은 자주적 근대화를 향한 시도였으나 곧 이어질 식민지 시대로 인해 그 실험은 온전히 꽃피지 못했다.

정치사의 분수령도 여럿 기록됐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권위주의 체제에 균열을 냈고, 1986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본격화됐다. 이는 이듬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물줄기를 형성했다. 1997년에는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같은 날, 2013년 북한은 풍계리에서 3차 핵실험을 강행해 한반도 정세를 긴장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과학기술의 도전도 2월 12일을 수놓았다. 1961년 소련은 금성 탐사선 베네라 1호를 발사하며 우주 탐사의 지평을 넓혔고, 2001년에는 인간게놈프로젝트(HGP)와 셀레라지노믹스가 인간 게놈 지도 완성을 공식 발표했다. 생명의 설계도를 해독한 이 성과는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동시에 생명윤리 논쟁을 촉발했다. 2016년에는 어드밴스드 라이고(LIGO)가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 예측한 중력파를 검출하는 데 성공하며 현대 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굵직한 사건이 이어졌다. 1999년 미국 상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부결시켰고, 2011년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18일간의 민주화 시위 끝에 퇴진했다. 1979년 이란은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며 중동 질서에 파장을 일으켰다.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상징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의회(NAACP)도 1909년 이날 창립돼, 링컨 탄생 100주년을 기점으로 미국 시민권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한편 사상사의 거목 이마누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 마음을 더욱 놀라움과 경외로 채우는 두 가지는 하늘의 별과 내 안의 도덕률”이라고 남겼다. 전쟁과 혁명, 과학 혁신이 교차하는 역사 속에서도 인간을 붙드는 힘은 결국 내면의 도덕적 성찰임을 일깨우는 말이다.

이날은 또한 남북이 단일팀 구성에 합의한 1991년 남북체육회담, 해외부재자투표제 부활(2009년),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준공(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단원고 학생들의 명예졸업(2019년) 등 화해와 추모, 미래를 향한 발걸음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박종영 시인의 ‘겨울 산수유’는 “오욕으로 더럽힌 세상 씻어내는 눈물인가”라고 묻는다. 매서운 계절을 홀로 견디는 산수유처럼, 역사의 굴곡을 지나온 인류 역시 상처와 성찰 속에서 다시 꽃등을 켜왔다. 2월 12일은 그렇게 말한다. 먼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붙들라고. 그리고 그 오늘이야말로 역사를 바꾸는 출발점이라고.

 

김가연 기자  k-gayeo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가연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