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주 3.1 운동 기록 개설 (朔州三一錄 槪說) 번역
오호라! 우리나라가 단군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 수천 년 사이에, 외적의 침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우리 순종 효황제 융희 4년 경술년(1910년)의 치욕과 같은 적은 없었다. 저 3천 리 강역의 크기와 3천 리 백성의 무리로써 칼 한번 시험해 보지 못하고 탄환 하나 쏴보지 못한 채, 왜놈(倭奴)의 판적(식민지)으로 넘어가니 어찌 천지신명이 함께 분노하고 초목과 조수가 함께 슬퍼할 바가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그 후 9년이 지난 무오년(1918년)에 북만주에 망명해 있던 여러 의사(義士) 서일(徐一), 이상설(李相卨) 등 여러 공(公)이 대한독립을 선언하니, 왜놈들이 이를 듣고 공포에 떨며 마침내 고종 태황제께 독을 써서 시해하였다. 이로 인해 뭇 의사들의 분노가 넘쳐흘러, 이듬해 기미년(1919년) 2월 8일에 왜국의 도읍 동경(도쿄) 유학생 이광수, 최팔용 등 여러 사람이 또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불렀다. 왜놈들이 크게 수색하여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혹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4월 10일에 이르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리에 거사를 모의하기도 하였다.
중략: 국내외 정세와 3.1운동의 발발) ...내지(국내)에서도 같은 해 3월 1일 인산(고종 장례) 때를 기하여 대중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삭주 지역의 거사 준비와 역할 분담]
이에 앞서 삭주의 의사(義士) 송은(松隱) 이관집(李觀楫 : 이유립 선생 부친)이 북만주에 들어가 독립선언 때 참여하고 국내로 들어와 동지들과 더불어 모의를 더욱 은밀히 하였다. 다시 사방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국내외의 대의(大議)가 이미 움직이고 있음을 알리고 마침내 돌아와 비밀리에 조직을 짰다.
김탁(金鐸), 기양보(基陽甫)는 유림(儒林: 유학자 계층)을 맡아 설득하고,
최석순(崔錫淳)은 청년계(靑年界)를 맡고,
장찬진(張燦鎭), 이응함(李應涵), 김찬정(金贊禎)은 야소교(耶蘇敎: 기독교)를 맡고,
홍석호(洪碩浩), 김봉익(金鳳翼)은 천도교(天道敎)를 맡고,
이봉우(李奉禹), 최시흥(崔時興)은 향신(鄕紳: 지방 유지/양반)을 맡고,
이장청(李長靑)은 부녀계(婦女界)를 맡고,
이용담(李龍潭)은 농상계(農商界: 농업과 상업 종사자)를 맡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 4월 7일의 봉기]
마침내 4월 7일 (음력 3월 7일 기축일)에 이르러 각지에서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봉우(李奉禹), 명구하(明璉夏)는 연포동(延浦洞)에서 일어나고,
이해창(李海昌)은 송정동(松亭洞)에서 일어나고,
한덕용(韓德湧), 이상희(李相禧), 강종문(姜宗文)은 동부동(東部洞)에서 일어나고,
박용각(朴鏞珏)은 대보동(大堡洞)에서 일어나고,
최석순(崔錫淳), 최석호(崔錫浩), 장찬진(張燦鎭), 임기종(林箕鍾), 김명봉(金明鳳), 김홍수(金弘洙-성내), 김인손(金仁孫-통곡), 안준호(安俊浩), 김봉익(金鳳翼), 안성전(安聖奎-장곡)은 서부동(西部洞)에서 일어나고,
김효성(金孝成), 이지백(李之白), 이원모(李元模-수안인)는 인풍동(仁豊洞)에서 일어나고,
이관실(李寬實), 전택수(全澤秀), 백남규(白南奎)는 수풍동(水豊洞)에서 일어나고,
이유항(李裕沆), 김윤권(金潤權), 김윤봉(金允鳳)은 신풍동(新豊洞)에서 일어나고,
주원건(朱元鍵), 주상옥(朱尙玉)은 신안동(新安洞)에서 일어나고,
김태연(金泰淵), 김시행(金時幸)은 판포동(板布洞)에서 일어나고,
김탁(金鐸), 김찬도(金贊道), 탁성룡(卓成龍), 장모(張某)는 연삼동(延三洞)에서 일어나고,
이양희(李陽熙), 최태희(崔泰熙), 이영항(李永恒)은 금오동(金五洞)에서 일어나고,
서청산(徐靑山), 오동진(吳東振)은 청수동(靑水洞)에서 일어나고,
홍석호(洪碩浩), 이동규(李東奎)는 창신동(昌新洞)에서 일어나고,
이구모(李九模)는 남평동(南坪洞)에서 일어나고,
주모(朱某)는 청계동(淸溪洞)에서 일어나고,
최지흥(崔志興), 최지풍(崔之豊)은 남장동(南長洞)에서 일어나고,
이기황(李枝晃)은 수룡동(水龍洞)에서 일어나고,
이학주(李鶴胄)는 송평동(松坪洞)에서 일어나고,
이백영(李伯英), 김모(金某)는 봉황동(鳳幌洞)에서 일어나고,
이만식(李萬植)은 송남동(松南洞)에서 일어났다.
그 외 나머지 덕룡(德龍), 상원(上院), 풍대(豊大) 등 여러 동(洞)에서도 역시 일어났다.

각자 대(隊)를 이루었는데, 큰 부대(大隊)는 수천여 명이고, 작은 부대(小隊)도 7, 80명을 밑돌지 않았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가를 부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삭주 읍내로 쇄도해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고개 안쪽 각 마을의 군중이 삭주 군청 관아에 이르러 왜놈(倭奴)의 경찰서를 포위하고 소리 높여 외치기를 "우리나라가 이미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너희 구속된 무리는 속히 철수하라"고 하였다. 혹은 돌을 던지고 혹은 기와를 깨뜨려 그 문과 벽을 파괴하며 기세를 몰아 핍박하니, 왜놈들이 계책이 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 |
이에 한국인 앞잡이(韓奸) 이동희(전주 사람)와 배동희를 시켜 총포로 마구 난사하게 하니, 죽고 다친 자가 또한 수십 명이었다. 해가 저물어 각자 물러가 돌아갔으나, 다음날 또 이와 같이 하기를 혹은 3~4일, 혹은 7~8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야간 산상 시위와 선전 활동]
4월 15일에는 연포, 신풍, 수풍 3개 동의 청년 3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또한 매일 밤 경찰서 뒷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큰 돌을 굴려 마치 호랑이처럼 소란스럽게 하고, 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이와 같이 한 것이 한 달 남짓 되었다.

이때 이봉우(李奉禹), 이관집(李觀楫), 김석규(金錫奎) 여러 사람이 함께 구성재(求誠齋)에 있으면서 옛 역사를 강론하고, 청년들에게 권하여 독립 제반 단체에 많이 가입하게 하였다. 향촌의 많은 선비들이 또 의민사(義民社)와 정의청년결사대(正義靑年決死隊), 몽사단(蒙士團), 삼육사(三育社)를 조직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도회지와 시골 마을에 살포하고, 또 거리의 가옥 벽에 붙여 국내 민심을 고무하고 열렬한 여론을 일으켰다.
[만주 망명과 독립군 편성]
그러나 왜놈의 뿌리가 이미 굳게 박혔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뽑아버릴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왜놈들의 눈이 더욱 핏발이 서서 의사(義士)들을 크게 수색하여 잡히면 곧바로 죽이고 또 가두었다. 고을 안이 쓸쓸하여졌으나 매와 개 같은 무리(일제 앞잡이)들이 여전히 사방으로 정탐하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만주로 건너갔다(渡滿洲).
혹은 군정서(참의부 등을 의미)에 머물며 정의를 의논하고, 의민사, 벽창의용단, 벽파대, 광복군 총영 등을 결성하여 그 장사(壯士)들을 뽑아 독립군으로 훈련시켰다. 그 나머지는 본 고장 천마산 등지에 근거하며 만주 독립군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여 때때로 출동해 왜놈을 습격하고, 내외의 여러 동지와 연락하고자 하여 낮에는 엎드리고 밤에 다니더니 마침내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지하 행정 조직 수립과 배신]
이듬해(1920년) 5월, 재주(在州: 삭주에 있는) 의사들이 또 서로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미 상해에 수립되어 국내 각지에 모두 부서와 기관을 설치하였으니, 우리 평안북도에도 역시 독판부(督辦府)를 두어야 한다. 우리 삭주만 홀로 군감(郡監), 면감(面監) 등의 직책과 호칭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서로 추천하여 송영호(宋永昊)를 군감(군수)으로 삼고, 강종문, 김영기를 참사로, 김서준, 김정노, 이관실, 이학주, 주원건, 임시쟁을 장서(서기)로, 최석순을 경감(경찰서장)으로, 주형규, 오봉근, 이영선, 최석인, 최겸순, 이백영을 참의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영호, 주형규, 김정노는 도리어 왜놈에게 붙어버려(변절), 송영호는 삭주면장이 되고 주형규는 구곡면장이 되고 김정노는 면 서기가 되었다.

[조직 재정비와 계속되는 고난]
독판부에서 이를 듣고 개탄하여 다시 선거하여 고쳤다. 구성재(求誠齋)에 모여 김내문(석규), 이정보(관집), 이해창, 백남규의 힘쓴 추천으로 오봉근이 참사로서 군감 서리(대행)를 맡았다가 한 달 후에 사면하였다. 이준희가 후임이 되었으나 일이 발각되어 왜놈에게 피살되었다.
김내문, 이정보가 다시 최우석에게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오동진, 이벽산, 최시흥이 서로 추천하여 이정보(이관집)를 군감으로 하고, 나머지도 또한 고쳐서 백남규를 총무로, 김내문을 참사로, 최겸순을 삭주면감으로, 최효진을 구곡면감으로, 이영선을 남서면감으로, 최석인을 외남면감으로, 이백영을 수동면감으로, 박모를 양산면감으로 하였고, 청수면감은 비워두었으며(闕), 이홍린을 경감으로 삼았다.
그러나 (구곡면감) 최효진이 정의청년회 간사 김효성(연안 사람)과 틈이 생겨, 왜놈에게 반역하여 붙어서 그 사실을 밀고해버렸다. 이 때문에 김효성, 이태접, 김윤권, 신청정 등 여러 공(公)은 체포되어 복역하였고, 이서준, 백선건, 백남규, 김윤하 등 여러 사람은 피신하였다. (하략)
[비밀결사 '통균사'와 무기 운반]
이전에 삭주의 선비 송은(松隱) 이관집(李觀楫)이 기미년(1919년) 의거를 은밀히 돕고 또 그 아우 이태집(李泰楫), 조카 이양보(李陽甫) 및 문하의 여러 사람과 더불어 통균사(統均社)를 설립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우리나라 전래의 정치 제도를 연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통상(장사)을 핑계하여 압록강에 많은 선박을 배치해 두고, 의군(독립군)을 건네주거나 군기(무기)를 운반하려 함이었다.
![]() |
[조직의 와해와 희생]
이에 이르러(얼마 안 가), 이태접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됨으로써 통균사의 일 또한 대부분 왜놈들에게 발각되었다. 그 사원(회원)들이 혹은 체포되어 갇히고 혹은 도망가니, 선박과 재물은 모두 왜놈들에게 불태워지거나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만주 홍석랍자(紅石砬子)에 있던 의민사(義民社) 및 광복군 여러 진영 또한 이(통균사의 지원)에 많이 의존했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안팎의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사장(社長) 이벽산(李碧山-이덕수)은 왜놈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사원 백남규(白南奎), 박응룡(朴應龍), 이병진(李炳珍-경주인), 이병수(李炳秀), 이달전(李達筌), 이석룡(李錫龍), 이봉하(李鳳廈) 및 의사 이장청(李長靑) 등 여러 사람이 혹은 죽고 혹은 도망하였다. 여러 의사들로 하여금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게 하고 원통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게(歸天) 하니, 오호라 슬프도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 그러나 저 왜놈들의 탐욕은 만족할 줄을 몰라, 만약(마치) 우리나라를 다 삼킬 듯하더니 만주를 석권하고 중국을 침입하다가, 마침내 천하의 병사(연합군)를 움직이게 하였다. 드디어 기미년 의거 후 27년이 지난 을유년(1945년) 8월 15일(음력 7월 7일)에 망하고, 우리 정부가 스스로 상해로부터 곧 개선하여 돌아오니, 어찌 뭇 의사들의 영혼이 상제(하느님)께 호소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남북 분단과 남한으로의 피난] 그러나 연합국 각 나라가 자기 당(세력)을 옹호함으로써 마침내 호토(虎兎: 범과 토끼해, 즉 6.25 전쟁 전후의 혼란기)의 난리에 이르렀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평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나, 제갈공명의 밝은 지혜로도 미리 내다보지 못한 바였다. 저 의사들의 영혼에 대해 또 어찌하겠는가!
지금 '불녕(不佞: 글쓴이가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어리석은 나')' 등이 호토(전쟁) 전후에 난리를 피하여 남쪽(남한)으로 내려와 향사(鄕社: 고향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하였다. 모여 앉으면 매번 고향 일을 이야기하는데, 기미년 의거보다 더 큰 일이 없으므로, 이에 여러 의사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열거한다.
[마치며: 기록의 이유]
먼저 이 개설(개요)을 쓴 것은 의거의 전말을 밝히기 위함이나, 또한 끝내 알지 못하는 바가 있어 열전(가장행렬)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을까 두렵고, 혹 빠뜨린 것이 있어 총명함이 미치지 못하거나 기록이 갖추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그러나 천제(天帝)께서 이미 아실 것이니,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랴. 오직 원하건대 (이 기록이) 더욱 빛나고 드러나서, 우리 국가로 하여금 저 단군(檀君)과 환웅(桓皇)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노라.

『삭주 3.1 운동 기록(朔州三一錄)』에 따르면, 삭주 지역의 3.1 운동은 치밀한 사전 조직화, 격렬했던 만세 시위의 전개, 그리고 시위 이후 무장 투쟁 및 지하 행정 조직 결성으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발전 과정을 보였습니다.
주요 전개 과정과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개 과정
1) 치밀한 사전 준비와 역할 분담 삭주의 3.1 운동은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라, 북만주에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돌아온 이관집(李觀楫)의 주도로 준비되었습니다. 이관집은 동지들과 은밀히 모의하여 다음과 같이 각 사회 계층별로 책임자를 두어 조직을 짰습니다.
• 유림(유학자): 김탁, 기양보
• 청년계: 최석순
• 야소교(기독교): 장찬진, 이응함, 김찬정
• 천도교: 홍석호, 김봉익
• 향신(지방 유지): 이봉우, 최시흥
• 부녀계: 이장청
• 농상계(농업·상업): 이용담
2) 4월 7일 대규모 봉기 거사는 1919년 4월 7일(음력 3월 7일)에 단행되었습니다. 연포동, 송정동, 서부동 등 각 마을(동)별로 지도자들이 대열을 이끌고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 수천 명에 달하는 대부대부터 7~80명의 소부대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가를 부르며 삭주 읍내로 쇄도했습니다.
• 시위대는 일본 경찰서를 포위하고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돌과 기와를 던져 경찰서를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 이에 일본 경찰은 한인 앞잡이(이동희, 배동희)를 시켜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3) 야간 산상 시위와 선전 활동 (지구전) 4월 7일의 1차 봉기 이후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4월 15일에는 청년 3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매일 밤 경찰서 뒷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돌을 굴리며 만세를 부르는 시위가 한 달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구성재'라는 곳에서 역사 교육을 하고 격문을 배포하며 민심을 고취시켰습니다.
4) 무장 투쟁 및 지하 행정 조직으로의 전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의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광복군 총영 등)에 가담하거나, 천마산 등지에 근거지를 두고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 독판부(督辦府) 설치 시도: 1920년 5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삭주 지역에 독판부를 설치하고 군감(군수), 면감 등의 지하 행정 조직을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출된 인물들의 변절과 밀고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 통균사(統均社) 활동: 이관집 등은 겉으로는 정치 제도 연구 및 상업 조직을 표방한 '통균사'를 설립해, 실제로는 압록강을 통해 독립군을 도강시키거나 무기를 운반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2. 삭주 3.1 운동의 특징
• 전 계층과 종교를 아우르는 통합성: 유림, 기독교, 천도교뿐만 아니라 청년, 부녀자, 농상인까지 각 계층별 대표를 선정하여 체계적으로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 적극적이고 격렬한 투쟁성: 단순히 만세만 부르는 비폭력 시위에 그치지 않고, 경찰서를 포위 공격하고 투석전을 벌이는 등 실력 행사를 동반했습니다. 또한 낮에는 엎드리고 밤에 활동하거나 산상 횃불 시위를 벌이는 등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 장기적·조직적 항일 운동으로의 발전: 일회성 시위로 끝나지 않고 의민사, 정의청년결사대 등 다양한 단체를 결성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판부라는 자체 행정망을 구축하려 하거나, 통균사를 통해 무기를 운반하는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독립 전쟁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이 큰 특징입니다
![]() |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